6월 하순에 제주도에 와서 흉금을 털어놓고 한일관계의 전진을 위해서 얘기한다고 했던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일본수상이 지난 7월29일 오전에 일본의 오랜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제사지내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참배했다. 한국이나 중국의 심한 반발을예상하면서도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데는 그 나름으로서의 이유를가지고 있다고 해야한다.야스쿠니 신사란 1868년의 이른바 명치유신(明治維新) 전후부터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거쳐 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이 흔히 말하는 영령(英靈)을 제사지내는 일본의 전통적인, 매우 국가주의적인 신토(神道)의 신사이다. 2차대전 전에는 전쟁터에서 죽어서 그 영혼이 야스쿠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일본국민의 최대의 영예라는 교육을 그들은 주입했다. 지금은2백40여만명을 제사지내고 있다고 하는 데 그 안에는 전후 국제전범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이른바 「A급 전범」도 포함돼 있다.세계가 그들을 아무리 전쟁범죄인이라고 해도 애국적인 영웅이라숭배하고 그들의 영에 머리를 숙이고 그들의 덕을 기린다는 것이다.◆ 우익폭력과 결탁한 어두운 정치문화여기에 일본 정부 수상이 또 당당히 「내각총리대신」이라고 공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것이다. 다만 8·15 날만은 피해서7월 29일이 자기 생일이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자기친척들 제사도지내고 있으니까라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이란 의심스러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왜 그런 물의를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우선 일본의 정신풍토라는 것을 생각해야하겠다. 얼마전에 일본 우익 폭력단이 동경에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 정문을 자동차로 공격하고 침입을 시도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 우익이 독도문제 등으로 시끄러울 때 「애국」의 기세를 한번 내외에과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애국이 그들이 내거는 「신념」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알려야만폭력단으로서 위세가 선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폭력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목숨을 잃는 것도 투옥되는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용맹」의 명성을 떨쳐야 그들의 위협과 공갈이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건축현장에 검은 차를타고 색안경을 쓰고 그들이 나타나 거액의 찬조금을 거두어들일 수가 있게 된다.얼마전에도 일본의 대기업 다카시마야(高島屋)백화점 간부들이 체포됐다. 주주총회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사전에 예방해달라고 10여년 전부터 폭력단 회장에게 거액의 「헌금」을 해왔다는 것이다.그래서 사장이 사임하느니 야단법석이었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고 마치 우리 나라 부정선거자금처럼 뿌리를 뽑는다고 소리만 무성하지 실효는 없었다. 우리나라 선거자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큰소리는 치지만 국민도 무감각하고 취체하는 당국도 무성의하다. 때때로 본보기로 몇건 운이나쁘면 걸리는 정도다. 그만큼 일본의 폭력단도 사회나 정치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가 얽혀있는 셈이다.그런 우익폭력을 인기 가수나 탤런트도 무시할 수가 없고 국회의원도 무시하지 못한다. 과히 크게 문제되지 않게 적당히 관계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할까. 이런풍토를 용납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일본인의 우경화된 심성이라고 해도 된다. 그들은 은근히 폭력을 숭상하고 있으며 그것에 맞서대결하기 보다는 기껏해야 그것을 기피할 정도다. 거기서 이성적인생각은 얼어붙고 본능적인 생각이 지배한다. 일본이 제일이고 남이야 어떻든 우리만 좋으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조상 친척 자식이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잃었으니 영령으로 받들어 제사지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것을 반대한다면 비국민(非國民)이고 용서할 수 없는 좌익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러한 반이성적이고 본능적이며 폭력적인 조직의 하나가유족회(遺族會)라는 것이고 하시모토수상은 바로 이 일본유족회와깊이 관계해 왔고 작년까지 그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개인으로서 품고 있는 「신념」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멀지않아 전개될 총선거를 앞두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은 바로 그들의 표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한 보수반동적인 움직임에 비판적인 이른바 리버럴하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시모토씨의 자민당에 투표하지 않을 것은 명백한사실이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리버럴한 사람들 또는 정치에무관심한 측은 기권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족회같은 고정표를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요즘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우경화 경향이 짙어진다고 하지 않는가.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의 이러한 정신풍토는 강화되면 강화됐지 간단히 변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풍토속에서 나오는 정치가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그런 풍토와 싸워나갈 것을 기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인물이 있다고 하여도 그는 정치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의 정치력이 아시아에서 그들의 경제력에 걸맞는 지도력을 발휘하기란 아주 어려울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게 생각할 때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철학을 공부한 어떤 젊은 학자가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결정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쓴 것은 퍽인상적이라고 하겠다.『지금의 일본이 한국에서 배울수 있는 것은 「메시지를 발하는 자만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들의 확고한 세계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인이 메시지를 발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또는 다른 여러 외국과 대등하게 사귀기 위한 길이다. 종군위안부 문제에서도 피해자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일본에 인간적인 강한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1996년 8월호 「世界」에서)이것은 한 일본 소장학자의 비판에 지나지 않고 일본정치가는 계속사과하고는 취소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것처럼 하다가는 그 발길로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려고 갈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얼굴, 일본국민에 대한 얼굴이라는 이중적인 가면을 계속 쓰고 있으면서 「인간적인 강한 메시지」를 발하지 못할 것이고 발하려고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세계를 변화시킨다우리도 이제는 일본의 이러한 정치풍토나 일본국민이나 정치가들의자세를 충분히 알게 된 것이 아닐까. 한일관계란 피할 수 없는 것인 이상 거기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슬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한일간에 마음으로부터의 화해나 협력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한기대일는지 모른다. 사실 어떠한 나라사이에서도 그런 것은 찾기어려운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거기에는 크게 나눈다면 두가지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을것 같다. 하나는 한일간에 진정한 화해없이도 함께 동북아시아의역사 속에서 큰 충돌이나 불행없이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에드워드 사이드 콜럼비아대학 교수가 말하는 대위법적 관계라고 하겠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쓰는 용어로한가지 음악에서 전혀 다른 여러가지 멜러디를 동시에 결합해서 복잡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썼다. 한일간에서도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충돌을 피하고 가능할 때는 서로 들어주고 더 큰 불행이 없도록하고 상호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협력한다. 이런 냉철하면서도 그다지 기대하는 것 없이 어른스러운 관계를 계속하는 것이다.둘째로는 그러면서도 어디에나 있는 뜻이 맞는 사람, 이해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한일관계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 이처럼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민관계를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미 여기저기서 그런 관계가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역사에서는 더욱중요하리라고 생각된다. 과거청산의 문제에 있어서도 한일간에 일본정부의 자세를 비판하는 시민연대가 이미 생기고 있지 않는가.나는 1965년의 한일협정 때를 돌아다보면서 언제나 깊은 감회에 잠기곤 한다. 그동안 30여년간, 한일간에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관계는 한일협정 때에는 상상할수 없었을정도로 전진해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운문제를 이렇게 역사적으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30여년간은 역사의 템포가 더욱 빨라질 것이 아닌가. 그때가 되면 하시모토수상의 오늘의 야스쿠니 참배를 아주 어리석은 정치 제스처였다고 회상하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