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념에 대한 도전」.아무나 생각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주위의 우려와비판에 동요하지 않는 굳건한 신념이 필요하다. 세속적 평가기준을무시할 수 있는 확신이 전제돼야 한다. 소시민적 삶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술좌석에서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 형극의 길이될 수도 있다. 기성관념에 도전하는 참된 의도를 인정받기도 쉽지않다. 오랜시간을 요구한다. 아니 육신이 땅에 묻힌 후에도 제대로평가를 받기가 힘들다. 경제적으로도 결단을 요구한다. 평생 가난을 벗삼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이같은 삶은 진정으로용기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만화하면 으레 재미있어야 하고 부담없이 시간을 죽여야한다….』 만화가 김준범씨(29)는 이같은 만화에 대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는 만화계의 「언더그라운드 기수」를 지향하고 있다. 영화로 비유한다면 흥행성만 중시하는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예술성까지 고려하는 프랑스나 동구권 영화에 가깝다. 그는단순한 오락물 제작자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의 체취나 깊이를 조금이나마 담으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우수」나 「허무」 그리고 「자유」의 체취가 나오는 것도 이같은 사정과 무관치않다. 94년 한국만화가협회 신인상 수상자로 탄탄한 기본기와 흥행성을 인정받고 있는 그가 자신만의 고유색깔을 고집하는 것은 남다른 인생역정을 만화로 표현하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됐다.◆ ‘공포의 외인구단’ 보고 만화가의 길로「공부를 싫어했던」 김준범씨의 최종 학교는 서울 경동중학교. 졸업후 마냥 집에만 있기도 뭐해서 처음 취직한 곳이 용산구 남영동소재의 변압기 공장이다. 8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뛰쳐 나왔다. 그러고 나서 피카소 밀레 등 세계유명화가들의그림들을 손으로 복제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3년정도 근무했다. 여기서 초가집이나 돼지 등 몇백원대의 그림을 그리는 「쫑쫑화가」노릇을 1년 가까이 했다.수습을 거친후 세계명화들을 손으로 복제하는 단계까지 올라갔다.이들 제품은 복사품이라도 수제품을 원하는 미국이나 유럽의 소비자들에게 넘어갔다. 2년동안 복제화를 그리다가 「보람된 직장이될 것같지 않아」 그만뒀다.하지만 변압기공장과 「쫑쫑화가」시절의 경험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녹아 흐르고 있다. 거대한 자본과 금력앞에서 위축되는 현대인의 「허무」와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로 되살아났다.집에서 쉬고 있던 김씨가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직접적 계기는 80년대 중반 공전의 히트를 쳤던 이현세씨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고나서다. 『만화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는게 입문동기다. 그래서 85년 인기만화가 허영만씨를 무작정 찾아갔다. 캐릭터와 작품주제가 다른 어떤 만화가보다 좋았기 때문이란다. 쳐다보지도 않던 허씨는 「5시간 동안 무릎꿇고」 자신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김씨의 정성에 감동해서 『5일후에 출근하라』며 마침내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허씨의 화실에서 처음 1년은 먹칠과 지우개질 그리고 각종 잔심부름을 하면서 보냈다. 그런 다음 허영만씨가 연필로 그린 원화에 펜으로 「배경을 입히는」 작업을 2년간 했다. 「카멜레온의 시」나「오! 한강」 등 허영만씨의 히트작이 당시 김씨가 펜터치한 작품들이다. 김씨는 3년간의 수습을 통해 작가근성을 배울 수 있었다.끊임없이 공부하고 독자들의 요구를 작품속에 반영하려는 허영만씨의 모습에 감명받았다. 또한 샐러리맨이나 청소년물 정치풍자 등허씨의 리얼리티 강한 작품세계는 김준범씨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6만원에서 시작한 월급이 20만원으로 올라가자 김씨는 허씨의 화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래가 불확실한 자기작품을 하기보다 허씨의 명성에 안주해서 월급쟁이로 전락하고 있는 선배들의 전철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마침내 89년 12월 김씨는 「기계전사 109」로 만화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래사회의 사이보그(기계인간)들이 인간에게 반항하면서벌어지는 전쟁을 묘사한 작품이다. 허영만씨의 스토리작가중 한명인 노진수씨가 스토리를 준 이 작품은 주간 「아이큐 점프」에 2년6개월간 연재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매주 20페이지 분량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 매일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다.이후 「따로따로 형제」 「부전자전」 「꼬마로보트 랙」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갓 데뷔한 작가로선 제법 명성을 얻는 기회였다.확실한 자기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등3만명이 김준범씨의 작품을 좋아하는 고정팬으로 자리잡았다.◆ ‘기계전사 109’ 연재로 폭발적 인기누려김씨는 이들 고정독자층과의 정서적 교감대를 두텁게 하기 위해서「자기세계가 확실한」 가수들과 자주 접촉한다. 뜬구름같은 찰나적 인기에 영합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자유 변혁 개성을 추구하는이들과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특히 이들 가수들의 가사에서 만화의 스토리를 빌려오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해 준다. 서태지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서태지와아이들 기념사업회」의 고문을 맡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만화도 자기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싶다는김준범씨. 만화가로서의 이같은 직업관은 데뷔이후 일관되게 잡지만 고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씨는 『만화방은 한국에만있는 특이한 현상이며 만화가의 생계유지나 만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만화잡지에만 기고해온 김씨의 원고료는 페이지당 2만5천원에서 출발해서 그동안 8차례나 인상됐다. 현재 격주간지 「영 챔프」에 22페이지 분량을 연재하고 있는데 한매당 6만5천원을 받고 있다. 월 평균 2백80만원 정도를 버는 셈이다. 하지만 화실사용료와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집에 가져 갈 수 있는 액수는 2백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입에 풀칠할 수준」의 원고료지만 「추공」 「까치」 「둘리」같이 대중화된 주인공을 의식적으로 창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상품화를 전제하기 보다는 주제에 걸맞는 인물을 그리는데 더 심혈을기울인다. 그런만큼 공전의 히트를 치기전에 주인공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힘들다는 점을 그는 인정한다. 그러나 작가의 주제의식에보다 부합될 수 있고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킬 가능성이 있어 선호한다고 말한다.현재 김씨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인종을 초월해서 사랑을 받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인간의보편적인 정서를 담아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그래서 앞으로 5년간 벌어들이는 모든 수입은 세계를 배낭여행하면서 쓸 계획이다. 그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 후 아직 누구도 다루지 못한 「다큐멘터리 만화가」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