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출근길 차에서 보내는 30분은 L부장만의 상상력을 키우는 시간이다. 오전에는 H자동차 광고대행사인 D기획, 오후에는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로 선정된 C사 마케팅팀과의 미팅이 있다. 오늘의 주제는 둘다 향후 진행예정인 조사프로젝트의 설계를 협의하는 것이다.제한된 미팅시간에 효율적인 결론을 얻으려면 클라이언트(고객)가요구하는 핵심적인 이유를 사전에 예상해 보고 그에 대한 해답을가능한 한 즉석에서 제시해야 한다. 잘되면 클리이언트의 신뢰를얻고(전문가라는), 최종결과 브리핑까지 일사천리로 간다. 물론 첫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끝날 때까지 삼수갑산에서 헤매게 된다. 그래도 그런 악성(?)프로젝트는 1년에 한 번쯤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고….회사에 도착하자마자 2주일에 한 번씩하는 기획회의를 주관한다.설립 8년만에 국내 조사회사 선두그룹에 위치하게 된 K사의 성장비결은 한마디로 「달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에서,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경쟁사의 위치에서 사고해보는 것이 차별화전략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지난 2∼3년간 후배리서처들에게 리서처보다는 마케터이어야 한다는 화두 아닌 화두를 강조한 것도 그이유이다. 후배와 함께 D기획으로 향하면서 문득 그간 만나온 많은 클라이언트중 인상적이었던 몇 명이 떠오른다. 먼저 현재 K사의 주요 클라이언트중 하나인 L화학의 H부장(처음 만났을 때 차장이었다)이 있다. 우리끼리 「L화학의 꿈돌이」라고 별명을 지어준 H부장은 늘새롭고 적극적인 제안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뉴리더중의한사람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마케팅플래너다. 두 번째로는 몇 년간간헐적인 관계를 맺어오다가 최근에 중요한 이슈로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H맥주의 P과장이 있다. 아직도 조사회사를 하청업체쯤으로 여기는 소수의 클라이언트가 있지만 P과장은 조사나 마케팅이전에 비즈니스 룰(Rule)을 아는 멋진 파트너이다.◆ 조사와 컨설팅 사이 전략적 방향설정 필요끝으로 가장 최근에 인연을 맺게 된 C그룹의 K부장은 정말 독특한사람이다. 신규백화점 프로젝트 때문에 한달 가까이(이례적으로)설문지작업을 함께 하면서 L부장은 명실공히 유통업계의 「전문가」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한 리서치데이터가 아닌, 마케팅정보의 의미를 아는 K부장에 대해, L부장은 조만간 마케팅컨설팅시장에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외부컨설턴트로라도 꼭 한 번 같은편에 서서 일하게 되길 기대하고 있다.D기획에서의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L부장이 아끼는 후배중하나인 자동차광 Y대리 덕분에 조금은 세과시도 하면서 잘 마무리됐다. 자동차조사를 하려면 차에 대해 알아야 하고 맥주조사를 하려면 술고래(Heavy drinker)여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L부장에게Y대리뿐만 아니라 줄담배(Heavy smoker)이면서 국내 담배시장을 꽉쥐고 있는 L과장이나 여성특유의 감각으로 가전시장을 꿰뚫고 있는또한명의 L과장은 K사의 대표선수이면서 예리한 공격무기들이다.오후미팅을 위해 H사 로비를 들어서다가 S통신 조사담당자를 우연히 만났다. S통신은 올 연초에 여러 조사회사간의 치열한 경쟁프리젠테이션후 K사를 연간 파트너로 선정한 정보통신 신규사업자다.한동안 일이 뜸해서 못만났던 클라이언트인데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L부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H사와 S통신은 현재는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지 않지만 향후 2∼3년이내에 확대된 「경쟁의 범위」에서 싸우게 될 사이니까.결국 H사에서 미팅이 좀 있다는 정도로 해두고 헤어지면서 L부장은며칠전 소주를 함께 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K사도(L부장도) 여러 곳에 데이터를 공급하는 일(조사)과 한두곳에서 집중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컨설팅)사이에서 전략적인 방향설정을 해야 할 거라던….두건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L부장의 책상에 서너개의메모가 있다. 우선 순위대로 정리해보면 1)T사 프리젠테이션 날짜통보 2)실사(자료수집)부서 업무협조요망 3)오늘저녁 대학동창모임예정 등이다. 당연히 3)번 메모는 못받은 걸로 해야지. T사 프리젠테이션 날짜에 맞추려면 오늘 저녁, 아니 밤시간은 꼼짝말라니까.★ 인터뷰 / 김용한 한국닐슨 사장한국닐슨은 직원규모나 매출면에서 국내최대의 조사전문업체다(모기업인 A.C.닐슨은 세계최대조사업체). 최대업체의 사령탑인 한국닐슨의 김용한 사장은 국내조사업계의 산증인이다. 지난 68년 유한시장조사기획회사를 차리기도 했던 김사장은 그로부터 30년 가까이조사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를 만나 한국닐슨과 국내조사시장에 대해 들어봤다.▶ A.C.닐슨과 한국닐슨을 소개해 주십시오.A.C.닐슨은 한국닐슨의 모기업으로 국내에 진출한지 16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지사를 두다가 92년에 현지법인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923년에 시카고에서 출범한 미국조사업체로,소매점조사(Retail Audit)를 통해 최정상의 기업으로 도약했습니다. 시장점유율이란 개념을 일반화시킨 것도 A.C.닐슨의 큰 역할중하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TV시청률조사업체로도 유명해 닐슨레이팅(Nielson rating)이라고 하면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알 정도입니다. 한국닐슨은 그동안 고도성장을 보여 현재 2백여명의 정규직원을 거느리고 연간 1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소매점조사(Retail Audit)는 어떻게 이뤄집니까.여러가지 제품이 소매점포에서 어떻게 판매되고 있는가를 조사하는것입니다. 가장 크게 이뤄지는 것이 식품인데 현재 전국에 약 13만개의 식품점이 있습니다. 이를 다 조사할 수 없으니 이중에서 통계적으로 뽑아낸 샘플식품점을 골라냅니다. 그 샘플만도 1천1백개소에 이릅니다. 회사에서는 이들과 미리 협정을 맺어놓고 조사요원이매월 다니면서 소매품의 재고량과 구입량을 조사합니다. 이같이 지역별 종류별로 조사 분석한 정보를 사전에 계약한 업체들에 판매하는 것입니다. 계약은 2년 단위로 하지만 한 번 조사결과를 본 업체에서는 보통 계속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품목의 데이터를 1년정도 계약하면 최소 3천만원쯤이 필요합니다.▶ 소매점조사같은 신디케이티드조사의 국내현황은 어떻습니까.한국닐슨의 소매점조사뿐 아니라 MSK의 TV시청률조사나 한국갤럽의옴니버스조사등이 모두 신디케이티드된 것입니다. 하지만 옴니버스의 경우 그다지 활성화돼 있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한 번 조사를실행하면서 여러 고객들이 참여하게 되므로 경비절감이 가능한데도불구하고 고객들은 조사결과에 대해 자신들이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의식이 강한 것같습니다.▶ 신제품의 판매예측 프로그램인 베이시스에 대한 반응은 어떤지요.예상했던대로 좋은 반응이었습니다. 문의는 상당히 많이 받았고 현재 조사계약을 맺은 곳도 2∼3개사가 있습니다. 수많은 케이스를통계적으로 분석해 얻어진 마케팅모델이고 실사과정도 엄격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80%선에 육박합니다. 신제품을 기획하고 있는 업체로서는 보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5천만원정도에 달하는 비용이 경영자들에게는 좀 부담이 되는 듯합니다.▶ 조사시장규모가 광고시장의 1%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기업경영자들의 의식은 어떻습니까.외국의 경우 4∼5%에 달하고 있는데 우리나 일본은 1%정도에 머무르고 있지만 상황은 계속 좋아지고 시장은 커질 것으로 봅니다. 우선 시장에 대해서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창업주들의시대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조사가 왜필요하냐, 내가 시장에 대해서는 더 잘 아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의 국민의식과 같은 것인데, 우리는 그저 보고 느끼고 하는 것으로 이제는 알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이란 것은 보고 느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빨리 지속적으로 변화하게됩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조사가필요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영업전략이라면.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상품을 가져야겠다는 것입니다. 인지도높은 소매점조사가 있긴 하지만 보다 다양한 조사상품들이 있어야 회사가 커질 수 있겠지요. 실제로 TV시청률조사도 하고 있습니다. 또 2∼3가지의 기법들을 국내에 도입하려고 합니다. 다른 회사들도 어차피 외국의 조사기법이나 마케팅기법을 피할 수는 없다고봅니다. 그때그때 떨어지는 조사만 수행해서는 조만간 도태돼 버리는 치열한 경쟁시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