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말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농본사. 한농계열사로 이 빌딩에 입주해 있는 농약원료 공급업체인 한정화학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특정금전신탁을 활용,한농의 경영권을 장악한 동부그룹은 기존경영진과 직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인수작업의 대미를 순조롭게 마무리짓고자 했다.반면 경영권을 빼앗긴 신준식 전한농 사장과 처남인 김응상 한정화학사장 등은 주총을 최후의 반격무대로 삼으려고 했다. 이들이 믿는 것은 동부그룹의 경영권 장악을 반대한다는 머리띠를 매고 있는1백여명의 임직원. 이들은 동부측과 일전불사의 태도로 주총장을가득 메우고 있었다. 동부측에서도 한농인수작업을 총지휘한 한신혁 그룹경영조정본부장과 제1조정실 임직원들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주총은 싱겁게 끝났다.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인정한 기존 경영진의 양보로 별다른 충돌없이 새로운임원진이 선출된 것이다. 2개월여에 걸친 동부의 한농인수작업이완료된 셈이다.◆ 한솔 홀로서기 5년만에 19개 계열사 구축동부의 한농 및 계열사 인수는 기존 경영진들의 동의없이 이뤄진적대적 M&A의 대표적 사례이다. 동부 이외에도 한솔 신호 거평 신원 등 중견그룹들도 M&A를 활용해 몸집을 불려왔다. 이들 업체들은신규사업 참여에 소요되는 시간과 투자비용의 절감을 위해 M&A를선호한다.한솔그룹은 지난 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를 선언할 당시 「총자산5천1백억원, 매출액 3천4백억원, 계열사 2개」에서 불과 5년후에「총자산 2조 9천억원, 매출액 2조원, 계열사 19개사」로 급성장했다. 홀로서기를 선언한지 5년만에 매출액과 총자산규모가 각각 6배씩 증가했다. 계열사도 전주제지 등 제지 일색에서 정보통신 금융등 19개로 늘어났다.단기간에 한솔이 자신의 몸뚱이를 몇배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은M&A란 마법덕분이다. 제지산업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하기 힘들다는판단아래 핀란드의 노키아를 벤치마킹하여 정보통신업체와 금융기관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전략아래 동해종금(한솔종금)을공개매수를 통해 손에넣었고 전자부품업체인 한국마벨, 통신기기제조업체인 한화통신, PC사운드카드업체인 옥소리를 잇따라 인수했다. 또한 한솔제지의 안정적인 과산화수소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1백70억원을 들여 영우화학을 인수했다. 한솔은 이같은 인수로 2천년 매출액 10조원, 재계순위 20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기업인수는 시간을 사는 경영전략이다.」최근 종합의류상가인 거평프레야를 성공적으로 분양한 거평그룹 나승열 회장의 기업인수에 대한 지론이다. 거평같은 후발업체들이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단기간에 축적하기 위해서는 M&A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입찰장에 직접 가서 상대입찰가격과 의사결정권자를확인하고 응찰가격을 결정하는 것도 이같은 철학에 따른 것이다.나 회장의 경영철학은 지난 94년 대한중석 주식 21.4%를 6백60여억원에 인수함으로써 구체화됐다. 대한중석을 시작으로 거평그룹의인수행진은 계속됐다. 라이프유통을 2백74억원에 인수하여 유통업에 진출했고 영풍과 치열한 경합 끝에 1천1백억원에 포스코캠과 정우화학을 계열사에 편입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올해초에는 강남금고의 주식 49%를 1백억원으로 사들여 편입시켰다. 이같은 거평의M&A는 제조 유통 건설을 3대 기반축으로 2천년 30대 그룹으로 진입하겠다는 경영비전에 입각해서 이뤄지고 있다.M&A를 언급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그룹이 바로 신호그룹. 「마이더스의 손」 「부실기업의 조련사」로 통하는 이순국 회장은 스스로 M&A전문가로 인정받길 원한다. 신원그룹 발전사가 기업M&A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호그룹의 출발자체가 이 회장이 다니던중소제지업체 동방팔프의 인수에서 시작했다. 이 회장의 M&A능력은한국강관과 합성수지 제조업체인 신아, 화장지 생산업체인 모나리자 등의 인수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신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동양철관과 동양섬유 등을 잇따라 계열사로 편입시켰다. 신호그룹은 해외에서의 M&A도 적극적이다. 유럽의 M&A전문회사와 공동으로 스위스 중소은행 인수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최고경영자 개성따라 M&A기법 천차만별신호의 이 회장은 단순히 기업들을 인수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기업들을 환골탈태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지난 94년 구동독의 펄프회사인 로젠탈과 드레스덴사를9백만 달러에 인수한후 정상화시킨 것은 좋은 예다. 인수 1년만에기업가치를 2배이상 올려 놓았던 것이다. 이같은 이 회장의 능력을높게 평가해서 해당기업이나 금융기관이 M&A를 먼저 제의해 온다.이 회장이 직접 인수에 관여한 업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M&A를 원했던 업체들이다.한보 나산 등도 M&A를 통해 그룹규모를 확장시키고 있다. 물론 이들 그룹에 앞서 대우가 부실기업을 인수, 정상화시켜 국내 굴지의그룹으로 성장한 바 있다. 이밖에 태흥피혁그룹의 이은조 회장과엔케이그룹의 최현열 회장 등도 M&A를 통해 사업기반을 성공적으로확장시켜 온 사례로 꼽힌다. 이 회장과 최 회장 모두 M&A를 통해증시의 화제인물로 등장, 이름을 떨치고 있다.이들 그룹들이 M&A를 추진하는 기법은 최고경영자의 개성에 따라천차만별. 한솔은 지난해 정보통신업체를 인수하면서 에이전트인한국M&A사와 긴밀하게 협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평과 신호그룹은회장이 직접 입찰금액과 대상기업을 선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M&A자금은 주로 인수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차입하거나 증자나 사채발행 등을 통해 조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솔은 기업인수에 필요한 자금의 40%를 유상증자와 한솔제지 등의 이익금으로, 36%는전환사채와 회사채로 충당했다.신호의 이 회장은 기업인수 자금에 대해 『금융기관에서 빌리거나개인소유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금액으로 마련한다』며 『회사주식을 모두 사들이는게 아니라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정도만 대주주 보유지분을 사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적은 돈이 든다』고 설명했다.중견그룹들의 덩치키우기에 활용된 M&A기법은 앞으로 더욱 더 선호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M&A 박광호 부장은 『중견그룹들의 M&A를통한 사세확장은 일단 진정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면서도 『앞으론 자본만 풍부하면 어떤 기업도 사들일 수 있으므로 사세확장에 적극 활용될 전망이다』고 예측했다.그렇다고 M&A에 따른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초파산한 덕산그룹의 경우 M&A를 통해 급속히 사세를 키울 수 있었지만 결국 그 후유증으로 쓰러졌다. M&A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인 사후관리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M&A가 황금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도산으로 이어지는 값비싼 교훈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