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과 기업들 사이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 미술품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한층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술관을 운영하는 일부재벌들의 움직임도 전에 없이 활발하다. 특히 재벌총수 부인들의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기업과 미술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중추적인 일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술시장의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이들은 대부분 미술관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구입에도 적극적이어서 주요 고객의 역할도 하고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미술품 구입과 관련해서는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극히 꺼려 정확한 작품명이나 구입규모 등이 많이 가려져 있다는점이다. 다만 미술관의 규모에 따라 연간 수억내지 수십억원 가량을 미술품 구입에 쓰고 있다는 얘기가 미술계에서 흘러나오는 정도다. 재벌가 안방마님 가운데 미술계에서 요즘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인물로는 홍나희 호암미술관장을 들 수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 관장은 지난해 1월 관장 자리에 취임한 이후 일약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 가운데 한명으로 꼽힐 정도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홍관장은 지난10월 프랑스와의 문화예술 교류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인 꼬망되르를 받았다.◆ 삼성, 호암미술관 연간 1백억원이상 투자홍관장의 영향력은 그녀가 이끌고 있는 미술관의 규모를 살펴보면쉽게 알 수 있다. 호암미술관은 자타가 인정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민간 미술관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했던 귀중품을 포함해 약 1만5천여점의 미술품이 소장돼 있다. 이가운데는 국보와 보물급만도 91점이나 된다. 국보 133호인 청자신사 연화문표형주자를 비롯, 이중섭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과피카소 등 외국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designtimesp=4370>나 <금강전도 designtimesp=4371> 같은 명품도 다수 소장돼 있다.홍관장은 호암미술관에 연간 1백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운영비와각종 전시회 개최에 주로 돈을 쓴다. 외부의 미술행사나 기업메세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여기에서 미술품 구입비는 별도다. 올해의 경우 「바우하우스의 화가들전」을 개최한 것을비롯해 한국추상회화의 정신전도 열었다. 구겐하임미술관 걸작전도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관장은 그동안 미술전공자답게 호암미술관 소장품 수집에도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 주변사람들이 추천해 구입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직접 국내외 전시회를 둘러보고 사오는 경우도 적잖았다. 홍관장은 스스로 겸재의 작품을 인수하면서작품구입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이후 이 회장과 본격적인 수집에나서서 현재 호암미술관 소장품의 3분의 2 정도를 사들였다. 이 회장이 주로 도자기와 서화 등 고미술쪽에 관심이 많은 반면 홍관장은 현대화와 민화, 목기 분야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홍관장은최근에는 작품을 구입할 때 개인적인 취향을 되도록 배제한다. 한때는 혼자 국내외 전시회를 둘러보고 즉석에서 구입을 결정하는 일이 많았으나 요즘에는 반드시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자문을받는다. 또 구입할 작품의 추천도 미술관에 소속된 10여명의 큐레이터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홍관장이 미술계의 거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이회장의 배려가 큰힘이 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92년 홍관장이 삼성미술문화재단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 것이나 지난해 1월 호암미술관장으로 취임한 것 모두 이회장이 권유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게다가앞서 잠깐 설명했지만 이회장 역시 기회만 닿으면 작품을 사들고들어올 정도로 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후문이다. 특히이회장은 70년대 거의 매일 저녁 미술품을 사들이곤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전문경영인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하고 있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부인 정희자 대우개발 회장도 미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사다. 직접 경영 일선에 참여하고 있는 정회장은 지난91년 경주에 선재미술관을 연 것을 계기로 미술계 활동을 활발하게펼치고 있다. 정회장은 선재미술관의 설립자로 요즘도 미술관 운영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고 있다.◆ 최원석 동아갤러리관장, 유망작가 연수 보내정회장이 미술 분야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90년 미국 유학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남선재군에 대한 모정을 미술관 건립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정회장은 아들을 떠나보낸 이듬해 경주에 미술관을 지었고 이곳을 현재국내 미술관 가운데 가장 큰 전시장을 갖춘 공간으로 키웠다. 특히미술관을 서울이 아닌 경주에 지어 지역 예술문화 발전에도 큰몫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회장은 요즘도 후견인으로 선재미술관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있다. 게다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미술 관련 세미나나 전시회, 또는 모임 등에 자주 참석, 미술계에선 뻬놓을 수 없는 거물로 통한다. 선재미술관은 소장 작품수는 많지 않아 등록된 것만 1백50여점쯤 된다.선재미술관을 얘기할 때는 부관장인 김선정씨도 빼놓을 수 없다.김우중 회장의 외동딸인 김 부관장은 대학(이화여대 미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전문가로 선재미술관의 실무를 총괄하고 있다. 특히김 부관장은 본인 스스로 큐레이터로도 활동하며 95년에는 휘트니비엔날레를 직접 기획해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 요즘에는 신문 등에 미술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활동 영역을넓혀가고 있다.선경그룹 안주인인 박계희 워커힐미술관 관장은 미술계에서 좀 독특한 활동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박 관장 역시대학(미국 칼라마주칼리지)에서 미술을 전공, 삼성 홍관장과 마찬가지로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박 관장은 특히 국내 미술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84년 5월 워커힐미술관을 설립, 당시 새로 만들어진 박물관법에 의거해 미술관 1호 설립자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얻었다. 미술관 운영 면에서도 박 관장은 독특하다. 미술관이 워커힐호텔내에 있어 지리적으로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감안, 해외교류전 위주로 이끌어가고 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각국 문화원과 접촉,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주로 국내 작가보다는 해외 작가들의 작품을사모으는 편이다. 박 관장이 직접 해외의 유명 전시회를 둘러보고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연 소장 작품 가운데는 데이비드 스미스, 안토니 카로, 알렉산더 칼퍼 등 해외 유명 작가들의작품이 많다. 전체적인 소장 작품수는 약 4백50여점에 이른다.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부인인 배인순 동아갤러리 관장도 재벌총수부인 가운데 미술을 유난히 좋아하는 인물로 꼽힌다. 미술에 대한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도움도 크다는 후문이다. 특히 배관장은 최 회장이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회장 자리를 맡고 있어 더욱 힘을 받고 있다. 배 관장은 요즘 주로 40대 이하의 신진 작가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전시 무대를 제공해주고 우수작품에 대해서는 직접 구입도 한다. 장기적으로 가치있는 미술품이 주대상이다. 또 장래성 있는 유망작가를 뽑아 다양한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해외에 1개월 일정으로 연수를 보내주기도 한다.동양그룹의 이관희 서남미술관 이사장(고 이양구 회장 부인)도 맹렬히 미술계를 누빈다. 지난 92년 마포와 여의도에 60여평 규모의미술관 두곳을 개관한 이 이사장은 고령의 나이(60대 후반)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정열적으로 뛰고 있다. 이 이사장은 상대적으로 설자리가 좁은 신진작가와 지방작가들에게 장소를 빌려주고작품도 구입한다. 지난해부터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쌍용가의 박문순 관장은 그룹의 지원을 등에 업고 큰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김석원 전회장의 부인인 박관장은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소장품도 적고 행사도 많이 열지는 못했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활동한다는 계획이다.◆ 기업, 작가들 활동폭 넓혀 미술 대중화 기여박강자 금호미술관 관장의 활동도 눈여겨 볼 만하다. 박 관장은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으로 미술계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박 관장은 전시공간을 무료로 빌려주는 대신 작가한테 작품 한점씩을 기증받는 새로운 방식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방식은 요즘 미술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널리 확산되는분위기다. 공간 부족에 허덕이는 작가들도 상당히 선호한다는 후문이다. 박 관장 개인적으로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하고 직접구입하기도 한다. 약 4백여점의 작품을 갖고 있다.이밖에도 미술시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가 여장부들이 적잖다. 벽산그룹 김희근 회장 부인 이소영 갤러리아트빔 관장을 비롯, 신동아그룹의 이형자 갤러리63 관장, 극동건설 김세중 사장 부인 김성애씨 등이 그들이다. 또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대림그룹 총수 부인인 한경진씨도 그룹 산하 한림미술관의 안살림을 직접 챙기고 있다. 전시일정과 작가발굴은 물론이고 작품구입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 한씨는 또 한때 재벌총수 부인들의 미술 동호인 모임인 국립현대미술관회의 멤버로도 참여했었다.재벌부인들의 활발한 미술시장 참여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받는다. 침체된 미술시장을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전까지 전시공간 부족으로 곤욕을 치렀던 작가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간 자체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활동폭을 많이 넓혀줘 미술 대중화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자금력을 갖춘 총수부인들은 또 미술시장의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데도 어느 정도 이바지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사실 그동안 미술시장에는 세금을 피하기 위한 은밀한 거래가 적지 않았다. 세무 당국이 이따금씩 전시장 등에 대해 기습적인단속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을 운영하는 기업들의 경우 일정한 절차를 거쳐 미술품을 사므로 밀실거래를 바로잡는 디딤돌이 될 수 있으리란 설명이다.그러나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적잖다. 단순히 미술에대한 지원을 넘어 재벌들이 부인을 동원, 과세를 피하거나 재산증식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특히 금융실명제가정착되면서 자금의 흐름이 드러남으로써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설명이다.어쨌든 재벌총수 부인들의 미술관 운영은 하나의 큰 흐름이다. 이들이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국민들의 관심 여하에 달려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