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두뇌집단. 국내 주요 그룹의 경제연구소가 바로 그들이다.소속 그룹을 위해 장기전략을 짜고 경기전망을 예측하는 이 싱크탱크들이 최근 변하고 있다.첫 번째 변화는 그룹내 신분상승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환경이 급변하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그룹내에서 경제연구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경제연구소 대표들은 회장이 주재하는 그룹 주요 사장단 회의에 참석, 의사결정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경제현상을 이론적으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단순한 싱크탱크 역할에서 벗어나 그룹과 그룹 총수들의 최측근 참모로 부상하고있는 것이다.현대그룹의 정몽구회장은 취임직후 첫 계열사 보고를 현대경제사회연구원으로부터 받았다. 자동차 건설 전자 등 쟁쟁한 주력 계열사를 제치고 경제연구원장이 제일 먼저 불려갔다는 사실은 경제연구원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정회장의 경영철학인 「가치경영」의 방향과 줄기가 이 자리에서 구체화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기본 이데올로기부터 정책대안까지 제시경제연구소의 대표들은 최근 「또 다른 기조실장」 「회장실 경제수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룹의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거시적인계획을 수립하는 그룹내 브레인(Brain)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국내외 경제환경 변화가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지면서 전문가 집단인 경제연구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단기간의 승부를 결정짓는 경영자들의 「동물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론가들의 냉철한 시야가 필요해졌다는 얘기다.물론 경제연구소는 각 그룹의 기획조정실과 역할에서 뚜렷이 차별된다. 기조실이 비교적 단기적 전망에 근거해 사업계획을 수립한다면 경제연구소는 좀 더 거시적인 시야에서 미래의 큰 틀을 짠다.LG의 「도약2005」 대우의 「세계경영」 쌍용의 「아시아 비전21」한화의 「제 3의 개혁」 등 각 그룹의 장기 비전이 모두 경제연구소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해서 탄생했다. 『그룹의 경제연구소를 현악기로 비유하자면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저음악기로 비유할수 있다. 바이올린 등 고음 악기들이 화려한 소리를 낼 때 밑바탕을 묵직하게 받쳐주는 곳이 연구소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 이영수 박사의 말은 경제연구소가 그룹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또다른 변화는 연구영역의 확대다. 경기전망을 예측하는경제연구(리서치)에서 나아가 기업의 문제점을 진단하는경영지도(컨설팅)로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포스코경영연구소는 출발 자체를 「경제」가 아닌 「경영」으로 했다. 이름부터도 경제연구소가 아니라 경영연구소를 표방한다. 무엇보다 컨설팅 분야에 주력하겠다는 의도인 셈이다. 이 때문에 포스코경영연구소는 다른 민간연구소와는 달리 모기업인 포철로부터 지원받는 돈이 전혀 없다. 경영컨설팅과 교육연수, 연구용역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간다. 포스코경영연구소는 포철과 포철계열사들에 컨설팅하는 것만으로도 연간 1백억원 이상의 매출액을올리고 있는 경영통이다.LG경제연구원도 경영컨설팅 비중이 경제연구쪽보다 더 높다. 인력비중도 컨설팅쪽이 50%가 넘는다. 외부 컨설팅 의뢰도 많이 받는편이다. 지난해에는 한국투신과 신한은행의 인사제도 개선안을 마련했고 연초에는 강원도청의 조직개편안을 만들었다. 컨설팅을 강화해온 이유는 『연구소가 자생력이 있어야 직원들 사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윤호 LG경제연구원장)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90년부터 컨설팅 사업을 시작, 이 분야에 대한 남다른 노하우를 자랑한다. 외환은행 중소기업은행 대구은행 한미은행 등이삼성경제연구소의 컨설팅을 받은 고객들이다. 연구 분야를 경제·경영문제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문제 환경문제 복지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로 확장하고 있는 것도 최근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흐름이다. 경제분야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전반적인 흐름을 진단하고 국책까지도 제시하는 명실상부한 싱크탱크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남북문제와 동북아 지역연구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연구원내에 통일경제센터를 따로 두고 남북관계와중국 등 동북아 지역문제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으며 연구 결과를「통일경제」란 보고서를 통해 매달 발표하고 있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사회학 정치학 전공자들도 꾸준히 채용, 남북문제와 동북아 지역문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도 최근 정책연구센터를 신설하고 사회시스템 환경지역경제 교육 북한 국제정치 등 6개 분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처럼 국가 사회의 기본 이데올로기부터 정책대안까지 제시하는 영향력 있는 연구기관으로 발전해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정치 행정 교육 철학 등 여러 분야의 박사 인력을 채용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 연구원들 직장만족도 그다지 높지 않다한화경제연구소도 경제연구실 증권금융실 산업경영실 외에 정책연구실을 따로 두고 국내외 정치동향과 행정구조, 세계 각 지역에 대한 지역연구를 해오고 있다. 특히 한화경제연구소는 구공산권지역에 대해서는 수년간의 연구경험을 자랑하고 있다.이외에 대우경제연구소는 국내 최초의 민간경제연구소로 연구의 절반이 금융분야에 집중돼 있을 정도로 금융 분야에 강하다. 신한종합연구소는 일본 연구로는 국내 제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또 사회 문화 소비트렌드 분야에서도 앞서나간다. 87년 설립초기부터 이 분야에 대해 꾸준히 투자하고 연구해와 축적된 정보와 노하우를 자랑한다.그러나 민간 경제연구소가 그룹내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연구 분야가 확대되면서 사회의 리더로서 비중이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 많은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연구원들의 직장만족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급여수준은 국책연구소나 대학보다 높지만 이들은 미래를 불안해한다.연구소를 「평생직장」으로 생각하는 연구원은 거의 만나기가 힘들다. 기회만 있으면 대학으로 옮기기를 원한다. 대학이나 국책연구소는 정년을 보장해주지만 민간 경제연구소에서는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초의 민간연구소인 대우경제연구소가 세워진게 84년이니 우리나라 민간연구소의 역사는12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완전히 체계가 잡혀있지 않고 불안정한 구석이 많아 앞으로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운영될지 아무도알수 없다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이를 불안해한다.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도 만족해하는 연구원이 드물다. 학사나 석사나 박사나 다 불만이다. 학사나 석사는 연구소에서살아남으려면 박사 학위가 있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언젠가는 박사를 따야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 연구소에서는 시간이나 자금 등에 대해 전혀 지원해주지 않는다. 박사의 경우 「내가 이런 일 하려고 고생하며 박사를 땄나」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민간 경제연구소라는게 연구소이긴 하지만 그룹부설인만큼 학문과 거리가 먼 그룹 업무를 돌봐줘야 하는 경우가많은데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이를 잡무라 여기는 경향이 많다는것이다.그룹 이익에 연연하고 그룹 논리에 종속돼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한계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93년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타당성 문제를 놓고 당시 삼성경제연구소장과 기아경제연구소장이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이 그 예다. 각 연구소장이 소속 그룹의 이해를 대변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룹 브레인으로서의 역할을수행하되 국책에 대해서도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비판할 수 있는사회 공기로서의 연구소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느냐는 의문인 셈이다.그룹 부설 경제연구소는 학문과 기업을 연결하는 다리다. 말하자면이상을 현실에 접목하고 이론을 실물에 적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실물을 토대로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도 이들의 담당이다. 국내 민간 경제연구소의 역사는12년밖에 안되지만 짧은 기간동안 위상은 놀랄만큼 높아졌다. 그에맞는 책임과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은 몇 점일지, 앞으로의 분발을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