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제 관련 각종 규제를 풀겠다고 공언한 것은 어제 오늘의일이 아니다. 지난 70년대나 80년대에도 정부는 규제완화를 약속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기업인들에게 꿈을심어주곤 했다.그러다가 문민정부 들어서는 사회 각 분야의 자율화 분위기에 발맞춰 구체적인 규제완화 검토 대상까지 발표하는 등 진일보한 면모를보여줬다. 여기에는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높여 해외 기업들과당당히 겨룰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특히 정부는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규제완화를 앞장서서 추진한다는차원에서 각 부처 산하에 각종 위원회나 작업반을 만들어 작업을진행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 산하에 있는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과 세계화추진위원회가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실태조사를 벌이는 등 나름의 일을 하고 있고, 재경원의 경제행정규제완화위원회도 마찬가지다.특히 경제행정규제완화위원회는 지난 93년 이후 95년 6월말까지 총1천4백96건의 경제 관련 규제완화과제를 선정하여 이중 1천3백42건을 조치완료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총리실의 행정쇄신위원회도문민정부 이후 지속적으로 규제완화를 추진해 왔다.통산부의 기업활동규제심의위원회 역시 위원장인 서원우 서울대 교수를 중심으로 낡은 제도를 과감히 바꾸는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정부는 기업활동규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뒤를 받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경제부처 장관들의 관심도 각별한 듯하다. 특히김대통령은 지난 4월초 청와대 정례경제장관회의에서 경제규제완화를 연내에 매듭지으라고 참석했던 경제장관들에게 강도높게 지시했다.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경제사회가 건실하게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는 부정과 비리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경제법령과 제도를 투명하게 고치고 공정한 거래가 이뤄지는 환경을 조성하라고 강조했다.이에 통산부에서는 4월말에서 5월초에 걸쳐 기업규제 실태조사를벌였다. 기업의 경제활동을 막는 경제행정규제를 손질하기 위해 창업, 입지 등 6개 분야에 걸쳐 실태조사를 벌였다. 특히 통산부는그동안의 규제완화 조치사항에 대한 이행실태 점검도 함께 실시,정부의 의지를 반영했다.실무를 담당하는 경제부처 장관들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규제완화를 외치고 있다. 새로 장관에 임명되면 취임일성으로 예외없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약속하는 실정이다. 지난 8월의 개각에서 재경원 수장자리에 오른 한승수 장관 역시 9·3경제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기업활동에 힘을 불어넣고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는취지에서 규제완화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공언했다. 무게가 잔뜩 실린 발언이었다.◆ 규제완화는 구두선에 불과그러나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또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 역시 규제가 너무 많아 회사를 설립하고공장을 짓기가 수월치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제조업보다 유흥업을하려는 사람들이 느는 것도 공장설립에 대한 규제가 너무 심해 그렇다는 의견도 있다.특히 대다수의 기업인들은 실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바뀐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절차상 서류 몇가지가 줄어들었을 뿐 경쟁력 강화 측면에서는 나아진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정부의 발표는 요란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느끼는 규제완화 체감지수는 극히 낮다는 얘기다.대기업이 주축을 이루는 전경련은 최근 1백대 핵심 규제완화 과제를 발표하면서 기업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가 여전하다고 주장했다. 회원사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기업이 공장 하나를 짓는데 평균 9백25일이 걸리고 토지거래허가 신고지역이 전국토의70%에 달해 실수요 기업들이 토지를 제때 사지 못하는 등 실질적인완화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장설립 기간의 경우 일본4백92일, 대만 2백45일, 미국 1백75일, 싱가포르 50일, 말레이시아35일인데 비해 최대 26배나 소요된다는 설명이다.또 인허가 관련 서류도 평균 44.2건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동남가 국가들의 25.6건, 중국 9.6건, 선진국의 6.5건에 비해 훨신많은 셈이다.회사채를 발행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사회 결의에서 상장까지 36종의 서류를 준비하고 30단계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또 업무용 부동산을 구입하고 공장용지로 바꿀 때도 규제가 많아 일을 제대로 추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전경련측은 정부가 그동안 누차 주장해온 규제완화가 구두선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주장한다. 전경련의한 관계자는 정부의 규제완화가 당초 기대에 못미쳐 국가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이번 자료를 내놓았다며 하루 빨리 가시적인 성과가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중소기업의 입장도 대기업과 비슷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절박한 느낌도 든다. 전체 중소기업의 대표인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이하 기협중앙회) 역시 경제관련 각종 규제완화 조치는 핵심부분이 제외되거나 일선 행정기관의 처리지연등으로 효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등 겉돌고 있다고 지적하고있다.특히 기협중앙회는 시장진입이나 가격 규제 따위의 경제적 규제,시설 안전 근로기준과 같은 사회적 규제 등 핵심부문보다는 주로서류 간소화 등 행정절차적 규제완화에만 치중해 개별기업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과도한 규제 기업해외탈출 부채질이에 따라 중기협은 중소기업의 안정과 경쟁여건 조성을 위해 경제력 집중해소와 불공정 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규제는 존속시키되 경제관련 규제는 폐지하거나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부처간 이해관계 조정 및 규제완화의 일관성 추구를 위해 전담기구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가 경제난의 주범이자 기업들의 해외탈출을 부채질하는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경제전문가들이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아울러 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고 민간부문의 영역이 확대된 열린 경제시대를 맞아 장기적으로 볼 때도 자율성 강화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따라서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정부가 발벗고 나서 탁상공론식의 공염불보다는 문제의 사안을 제대로 살펴 현장의 소리를 최대한 반영하는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또 일각에서는 정부내에규제완화를 추진하는 위원회나 작업반이 난립, 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장은경제연구소 민병균 소장은 『지금 우리의 실정에서 규제는 최소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자칫하다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산업공동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인규 연구위원 역시 비슷한 의견을 개진한다. 김연구위원은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최대한 줄일필요가 있다』며 『어쩔 수 없이 규제를 할 때는 위반하지 않도록유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현장의 소리"피부 와닿는 변화 없어요"『기업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에서 규제완화가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 피부로 느낄만한 변화는 없습니다.』경기도 포천에서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만드는 (주)태윤실업을 경영하고 있는 신관일 사장. 그는 정부가 외치는 규제완화가 아직은크게 미흡하다고 강조한다. 이런저런 허가를 받는데 필요한 관련서류가 일부 줄어들고 일선 공무원들의 태도가 많이 싹싹해지긴 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여전히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특히 공장을 짓는데 여기저기에 걸림돌이 많아 애로가 이만저만이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인다.요즘 신사장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공장설립을 준비중이다. 불황이지만 그런대로 사업이 잘돼 확장을 준비하고 있다. 공장부지도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다. 다행히 과거에 비해 준비할 서류는 많이줄어들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뛸 일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는 허가가 자꾸 늦어지고 있어 영 불안하다. 늦어도 내년 1월부터는 공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희미해지는 느낌이다.특히 포천 일대는 군사지역에 묶여있어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공장 하나를 짓는데도 일일이 인근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서류가 군부대에 들어가면 시간도 오래 걸려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허가를 받는데 적어도 1개월 이상은 걸린다. 군부대에 일이라도 생기면 그 기간은 더욱 길어진다.그래서 그는 요즘 6년전의 악몽이 되살아날까봐 잠이 제대로 오지않는다. 당시 그는 공장설립 허가가 무려 6개월만에 나오는 바람에경제적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공장설립을 신청하고 곧바로기계를 들여왔으나 허가가 늦어져 6개월이나 한데에서 방치했다.자연 멀쩡했던 기계에 녹이 스는 등 후유증이 심각했다. 그는 그때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넌더리가 난다고 말한다.신사장이 각종 규제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적잖이 불거져나온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특히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족구장이라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어도그럴 수 없어 무척 안타깝다. 영세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이라 직원들에게 별로 해주는 것이 없어 조그마한 체육시설이라도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체육시설도 공장부지에 인허가를 받아 만들어야 하는데 공장부지가 절대적으로부족한 상황이라 힘이 부친다는 것.만약 공장부지가 아닌 곳에도 체육시설을 만들 수 있게 풀어주면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신 사장은 공장 부근에 약간의 농지를 갖고 있어 규제만 풀리면 언제든 족구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하지만 인허가가 늦어지는 것이나 공장 주변 땅을 제대로 이용하지못하는 것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 경영 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회사규모를 키우고 싶어도 현실적인 벽 때문에 포기해야할 때는 그야말로 숨이 탁탁 막히는 기분이다.이런 상황에서 계속 기업을 운영해야 하나하는 기분이 들 때도 적잖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신사장 입장에서 기업을 키우는데 가장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개발이익금이다. 공장 규모가 5백평을 넘으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이 개발이익금은 보통 수천만원에서많게는 1억원을 넘는 경우도 있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게다가 6백평일 경우 5백평을 초과하는 1백평에 대해서만 개발이익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6백평 전체에 대해서 납부해야 하므로 경제적으로 감당키 어렵다. 신사장도 일거리가 밀려드는 상황이라 공장을 대폭 확장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부담이 커 그러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신 사장은 다행히 규제가 많은 금융 면에서는 그다지 어려움을 모른채 일을 하고 있다. 사업이 잘되는 편이라 은행 등 금융권에 손 벌릴 일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15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신 사장은 그래도 요즘은 외부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 특히 일선 창구에서 만나는 공무원들의 자세는 괄목상대할 만큼 바뀐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않는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는 풀어야 할 규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