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전까지만 해도 거평그룹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경제계에 종사한다는 사람들조차 그런 회사 있지 하는 정도였다. 당연히 나승렬 회장도 재계의 무명인사에 가까웠다. 열심히 노력하는기업인이라는 정도의 평가를 받는데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거평은 가장 잘나가는 회사의 대열 한가운데에 서있다. 다른 기업들이 사업이 잘안된다며 계열사를 정리하고투자비를 줄이느라 야단이지만 거평 만큼은 예외다. 오히려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공격경영을 펼치고 있다.기회만 있으면 다른 기업을 인수하고 틈만 보이면 업종다각화 차원에서 영토를 확장한다. 대단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재계에서는고래를 삼키는 새우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나회장도 덩달아 최고의상종가를 기록중이다. 경영비법을 알려달라며 여기저기서 원고청탁과 강연요청이 쇄도한다.◆ 고래 삼키는 새우 ‘거평’거평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나회장이 정상적으로 회사 일을 챙기기가 힘들 정도로 외부의 강연요청이 많다고 설명한다.신호그룹이나 백화점 재벌 뉴코아도 마찬가지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신호는 기업 인지도가 아주 낮아 종이 만드는 회사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뉴코아 역시 업계 중위권의 백화점 사업을 하는 업체정도로 인식돼 있었다.일부에서는 건설업체인 한신공영 계열사의 하나쯤으로 생각하기도했다. 이는 뉴코아를 이끄는 김의철 회장이 한신공영에 오랫동안몸담고 있었던 까닭이다.하지만 신호나 뉴코아는 이제 재계에서 주목받는 신흥재벌로 부상했다. 신호 이순국 회장은 재계의 마이더스로 불리며 제지 일변도에서 벗어나30대그룹 진입을 눈앞에 둔 종합그룹의 총수로 부상했다. 신호는 현재 계열사만도 24개에 이르고 올해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30% 가량 늘어난 1조8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또 뉴코아 김회장은 올해 들어 일산 인천 평택 등지에 4개의 대형백화점을 새로 출범시키며 뉴코아를 30대그룹에 진입시키는 탁월한능력을 발휘, 주목을 받고 있다. 뉴코아는 96년 매출목표를 95년의1조2천억원에서 무려 70%나 늘어난 2조원으로 잡아 무난히 달성했다.아울러 롯데에 이어 업계 2위자리를 확고히 다질 것으로 전망하고있다. 이회장과 김회장은 재계로부터 불황시대를 이겨낸 대표적인경영인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이밖에 삼성가에서 독립한 한솔그룹, 의류재벌인 나산그룹과 신원그룹, 이랜드 등도 불황시대를 이겨내고 고속성장을 거듭해온 신흥재벌로 꼽힌다. 삼성가 맏딸인 이인희 고문이 실소유주인 한솔은분가한지 3년여만에 30대그룹에 진입, 삼성에서 독립한 위성그룹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나산 신원 이랜드 역시 깨끗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극심한 불황에 허덕이는 의류업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특히 박성수 회장이 2평짜리 옷가게를 모체로 키운 이랜드는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기업 설문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또 중학교 중퇴 학력의 나산 안병균 회장은 뛰어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올해 중앙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재계의 주목을 받으며 떠오른 신흥재벌들은 수적으로 상당히 많았다. 고생 끝에 재벌의 반열에 들어선 경우가 있는가 하면 거대그룹에서 분가한 위성그룹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이 가운데 덕산 건영 유원건설 등 상당수가 이미 부도로 쓰러졌다. 또 일부는 불황을 의식해서인지 몸집을 크게 줄여 감량경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독 앞서 열거한 신흥재벌들만 불황 속에서도 고속성장을 거듭하며 잘나가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재계는 우선 이들 신흥재벌들이 과감한 공격경영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가 안풀린다고 잔뜩 몸을 낮춘채 소극적인 경영을 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 난관을 헤쳐왔다는설명이다.특히 이들 신흥재벌들은 기업 인수합병(M&A)을 효과적으로 활용,큰 재미를 본 것으로 분석된다. 신호의 경우 재계의 명의로 불릴정도로 쓰러져가는 기업을 인수해 계열사 24개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급성장했고, 거평도 20개의 계열사 가운데 무려 12개가 인수기업이다. 새로운 기업을 세우는 방식으로 몸집을 키우기보다는 인수합병을 통한 기업확장과 관리로 사세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성장배경 논란속 ‘재계 활력소’ 평가도아울러 이들 신흥재벌들의 오너가 거의 예외없이 불굴의 추진력과맨손으로 대표되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라 할만하다. 이들 기업의 오너들은 한결같이 성실과 끈기, 배짱으로 무장해 어떠한 난관에 맞닥뜨리더라도 뚫고 나간다는 강한 정신력의소유자로 정평이 나있다.최근 각 대학의 경영대학원이나 산업대학원이 앞을 다투어 이들 총수들을 초빙강사로 모셔가는 것도 이런 경영자적 기질을 듣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이들 성공한 신흥재벌들은 특정업종에서 성공한 후 이를 발판으로다른 업종으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거평이 건설을 바탕으로 성장, 유통과 반도체 분야로 활발하게 진출해 사세를 키우고 있고 신호와 한솔은 제지로 발판을 다진 후 금융전자 유통쪽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또 옷장사로 돈을 번 나산 신원 이랜드 등도 업종 다각화 차원에서다방면으로 진출하고 있다.하지만 재계에서 이들 신흥재벌들에 대해 부러움의 눈길만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고생해 기업을 일구기보다는 남이 키워놓은 기업을 인수, 너무 손쉽게 기업을 확장해 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적잖다. 일부 신흥재벌들이 인수합병에만 매달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또 일부 재벌에 대해서는 부동산재벌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어있기도 하다. 나라 경제를 튼튼히 하는 제조업보다는 일확천금을건질 수 있는 부동산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쓴다는 얘기다. 그런가하면 이들 신흥재벌들은 다른 거대재벌들과는 달리 각종 여신규제를 받지 않아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분석도 있다. 성장배경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신흥재벌들은 재계의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기존의 거대 재벌들에는 자칫 자만하면 역전을 당할 수 있다는 자극을주고 새로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꿈을 심어주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뉴코아와 한솔은 올해 나란히 30대그룹 진입에 성공,대재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아울러 기가 죽어있던 중견그룹들에는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재벌에 대한 소유집중 완화정책에힘입어 앞으로 이같은 추세가 계속될 경우 몇 년 안에 재벌그룹 판도가 상당히 달라질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재벌들의 다음 행보가 주목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