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84억8천4백65만원 대 2백7억1천8백25만8천원」.지난 92년 14대 대통령선거직후 김영삼후보와 김대중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대선비용이다. 법정선거비용 3백67억원을훨씬 밑도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신고내역을 액면 그대로믿을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한명도 없다. 현명한 유권자들은 신고금액의 수배 내지 수십배가 대선판에 뿌려졌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통해 체득하고 있다. 실제로 대선이 끝나자마자 정치권에서는 여권이 최소 1천5백억원에서 5천억원을 사용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심지어 1조원 가량 지출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시 전국 2백37개지구당에 10억원만 내려보내도 2천5백억원 가까이 되고 수백개에달하는 직능단체 대책비, 대규모 유세비, 방대한 홍보대책비 등이논거로 제시됐다. 물론 김대중후보나 정주영 당시 국민당후보도 여권보다는 못하지만 법정선거비는 훨씬 초가했을 것이라는 주장이설득력있게 제시됐다.이전투구식 정치자금 공방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정치자금은 주로재벌들로부터 조달됐다. 특히 여권의 경우 재벌에 대한 의존도는절대적이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재판에서 확인됐듯이 현대삼성 대우 등 30대 재벌들로부터 각종 국책사업을 발주한 대가나금융세제상의 불이익을 배제해 준다는 명목으로 각종 정치자금을징수했다. 야권은 무기명 후원자와 특별당비 그리고 대기업의 「보험료」로 선거를 치렀다.◆ 야권에 집권 보험료 지불하라?이같은 대선자금 모금방식은 이번 15대 대선에서는 크게 달라질 듯하다. 김대통령이 취임일성으로 『재임중 정치자금을 한푼도 받지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여권핵심부가 공개적으로 정치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현정부 최대의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금융실명제도 정치권으로의 현금유입을 차단하고 있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처럼 대규모 검은돈이 정치권으로 흘러 가기가 어려워졌다고 금융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게다가 노씨 비자금 사건으로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는 등 국민여론이악화된 상황에서 재벌들이 또다시 정치권에 줄대기 경쟁을 하기가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90년대 이후 계속되고 있는 경기불황도기업들에는 큰 부담으로 와닿는다. 한계기업정리와 최고경영진의교체 등 경영환경에 대처하기도 힘든 판에 정치권의 요구를 일일이들어주기가 부담스럽다.그렇다고 해도 실탄없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일. 신한국당이97년 한해동안 재계에 손을 벌리지 않고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은 중앙당 후원금 3백억원과 국가가 지급하는 선거보조금 95억원, 지정기탁금 2백억원 등 6백여억원이다. 물론 개정 통합선거법에 따르면15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각 후보는 「80억원에 인구 1인당 5백원」을 가산한 금액(3백여억원)을 초과할 수 없어 선거법만 제대로 준수한다면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항상 괴리가있는 법. 수천억원은 족히 소요될 대선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벌들에게 또다시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다. 재계 또한 경기와 여론이 아무리 안좋아도 생명줄을 쥐고 있는 정치권의 요구를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기업들의 줄서기는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단 야권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 야권에 보험료를 지불하려는 기업은늘어날 전망이다. 이밖에도 증시에서 단기차액을 노려 정치자금을모집하는 것은 여권이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방법중 하나다. 특히증권거래는 실명제가 정착되지 않아 큰손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야권도 국고보조금과 후원회비 특별당비로 법정비용을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 다만 그 이상이 소요될 경우 애로를 겪게된다. 과거개미군단식 무기명 후원자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만 금융실명제 실시로 이것마저 어려워지면서 정치자금난이 가중될 것으로보인다. 야권이 대선TV광고의 국가부담과 정치자금범위 확대, 여당이 사실상 독식하고 있는 지정기탁금제도의 철회를 주장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여야의 죽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과거처럼 수천억원을 선거판에뿌려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유권자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가뜩이나 불황에 빠진 국내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는주장도 공감대를 얻고 있다. 하지만 대선이 정치집단의 전면 교체를 가져오고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등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싸움이라 최종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구태가 재현될 가능성은 높다.금품선거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21세기를 맞는 유권자와정치권에 주어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