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39)씨는 현대정보기술(HIT)의 재택근무사원.그는 93년 친구로부터 HIT가 재택사원을 선발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육아를 비롯해 가사문제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던 그에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희소식. 어린아이도 어디에 맡길 정도의 나이가 됐고 해서 안그래도 슬슬 일거리를 찾아볼 요량이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6∼7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익혀둔 전산기술을 묵히고 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그는 9명의 동료와 함께HIT가 일차로 선발한 재택사원이 됐다. 94년에도 HIT는 20명의 재택사원을 뽑았으나 한두명씩 퇴사하고 현재 남아있는 인원은 20명을 조금 넘는다.◆ 재택근무로 직업·가사 변행그의 하루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남편과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돼 버린 아이를 서둘러 밀어낸다. 설거지를대충 끝내고 나면 뻐꾸기 벽시계는 어김없이 9시를 향해 내닫고 있다. 연하게 커피한잔을 타고 오디오에 잔잔한 팝송을 건 다음486PC의 전원을 연결하면 근무준비는 완료된다.그는 주로 현대전자의 회계부서에서 맡게 되는 전산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한다. 하루 근무시간은 대략 대여섯시간. 늦어도 오후2시까지는 직장과 관련된 일을 마치려고 한다. 전화나 팩스 컴퓨터통신을 통해 업무연락을 하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회사에서 설치해준 PC전용선을 이용해 그대로 호스트컴퓨터에 전송하면 그만이다.직장일이 끝났다고 한가해지지는 않는다. 청소 빨래 장보기 아이뒤치다꺼리 등 본격적인 가사가 기다리고 있다. 재택근무 초기에는회사일이 많아 저녁식사가 끝난 후 야근작업을 하는 때도 많았다.그러나 지금은 일도 숙달됐고 늦게까지 근무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없다. 회사에는 한달에 4번정도 출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필요한 때나가면 된다. 마케팅부서의 담당자와 2시간정도 업무얘기를 하면일은 끝난다. 이렇게 일해서 받는 급여는 한달 평균 1백만원. 작업한 프로그램수와 작업의 난이도에 따라 달라져 많게는 2백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는 현재 하고 있는 재택근무에 대단히 만족해하고 있다. 가장 큰이유는 역시 집안을 돌보면서 근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장에 출퇴근해야 한다면 집안일을 맡아줄 사람을 별도로 둬야 하기 때문에실익이 없다.회사일을 하면서 삶을 알차게 보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어느 장소에 가든 스스로 의욕적인 자세를 보일수 있게 됐다.초기에는 뭣 모르고 어리광만 부리던 아이도 요즘은 책상에 앉아있는 엄마가 「근무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숙제를 하기 때문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드는데도 큰 도움이다.HIT에는 강씨외에도 20여명의 재택근무사원들이 있다. 대다수가 주부들이며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후 전산실 등에서 3∼4년간의실전경험을 쌓은 실력파들이다.홍보팀의 곽기영 팀장은 『재택 여성인력에게 맡길 업무가 꾸준히있는 회사라면 사무실공간을 절약하는 이점이 있어 적극적으로 도입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이 회사도 초기에는 윗사람(손창근이사)의 강한 의지와 지시에 따라 도입했지만 실무자들에게 반드시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일거리를 분류해서 재택사원들에게 나눠주는 가욋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무자들의 반응이 이렇다보니 재택사원들은 안그래도 어색한 판에 「열외사원」이란 소외감을 강하게 느껴야만 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됐다. 회사도 사원 한사람 한사람에 들어가는 간접비용을 줄일 수 있고 지불해야 할 급여도 크게 줄어 손해될 게 없다. 강씨를 비롯해재택사원들을 경력을 반영해 정규출퇴근직원으로 고용할 경우 회사는 지금의 3배에 달하는 연봉을 감수해야 한다.「출근도 안하고 퇴근도 없는」 재택근무형태가 우리사회에 도입된것은 80년대말이다. 데이콤이나 LG계열의 정보통신회사인 STM 등이국내 재택근무 도입에 앞장섰던 회사들이다.그러나 여러 매스컴을 통해서 크게 주목을 받았던 재택근무는 그열기에 비해 결코 폭넓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열기가 급격히 식어버리자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는 게 아닌가라는 분석도 나왔다. 업계에서는 『얼굴을 맞대지 않으면 뭔가 미덥지 않다는 우리네 풍토가 재택근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관습에 얽매이는 직장인들의 인식도 부인할 수 없는 걸림돌인것은 사실이다.◆ 장소의 한계 뛰어 넘는다그러나 재택근무는 애초부터 폭넓게 확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게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이다. 재택근무는 집에서 업무를 해도아무런 지장이 없는 전산입력이나 고객상담업무 등에 도입될 수 있으며 대개 관련회사에는 재택근무가 이뤄지고 있다.예를 들어 통신서비스업체들도 고객상담같은 업무에 직원부인등 가족들을 아르바이트요원으로 활용,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다.(주)나래이동통신의 경우 직원가족 60명을 고객상담요원으로 채용했다. 이들의 업무는 신규 삐삐(호출기)가입자들의 명부를 집에 있는 PC로 확인한 후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하거나 전화번호·주소가 틀린 경우를 찾아내 바로 잡는 일 등이다. 이들은 하루 4∼5시간을 일하고 월 40만∼1백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다른 분야로 재택근무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기업경영의 제도적인측면이 동시에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정보통신회사의프로그램개발자들이 간혹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집에서 일하는 - 일하는지 안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 이들의 급여를 어떻게 산정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업무결과에 따라 분명히 급여가 산정되지 않는 직종에서는 재택근무 도입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재택근무는 그러나 디지털화를 거듭하는 정보통신혁명에 의해 「장소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근무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즉 변화의 요지는 「집에서 근무할 수 있다」가 아니라 「사무실이아닌 어떤 장소에서도 근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기업내부에서재택근무가 확산되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장소라는 제약이 사라지면서 전문직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재택근무자가 늘어나고 이에 맞는새로운 직업들도 다양하게 개발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장소의 제약」을 궁극적으로 없애게 될 정보통신혁명은 최근 국내에서 모빌오피스(Mobile Office)라는 새로운 근무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IBM의 직원들에게는 일정한 자기책상이 없다. 노트북과 휴대폰 무선호출기로 무장하고 다니는 이들은 회사안팎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노트북화면을 통해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개인사물은 사물함에 보관하고 배정받은 자리에서 업무를 수행한 후 다시 고객을 만나러 나가면 된다.이로 인한 회사의 득실은 좀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일단 20개층을쓰던 한국IBM의 사무실은 12개층으로 줄어들었다.분명한 것은 디지털혁명이 붙박이였던 작업장을 이동식으로 만들고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