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도미노가 시작되고 있다. 아니 벌써 어느정도 진행돼 우리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정부가 한보부도파문에 따른 자금경색을 막기위해 통화를 탄력적으로 관리하고 수시로 환매조건부채권(RP)을 되사주는 방식으로 자금지원에 나서고있지만 전혀 약발이 서지않는다. 상업어음할인 전담재원이다 부도방지경영 안정자금이다 하며지원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어느 기업이 혜택을 보는지 미지수다.예전같으면 부도 도미노의 일차 희생양은 영세 중소기업이었다. 담보여력이 없고 자금융통이 힘든 체력이 약한 기업부터 쓰러졌다.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무차별적인 부도 도미노가 우려되고있다. 중견 상장회사들도 자금악화설에 시달려야 할정도로 상황이심각하다. 부채비율이 높고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부터 살생부에오르고 있다. 공격적인 경영으로 신흥재벌로 부상하던 일부 기업들의 주가도 곤두박질치며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한 주택건설업체도악성루머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오죽하면 정부가 악성루머를 단속하겠다며 진화에 나섰겠는가.이들 기업들은 앞으로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차환발행하는데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보의 부도사태 이후 은행 증권사들이 어지간한 기업에 대해서는 보증을 꺼리고있기 때문이다. 보증수수료 좀 챙기려다 수백억원을 물리면 10년 헛장사한것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보증업무를 취급하는 금융기관 담당자들은 한보부도이후 아침에 신문보기조차 겁난다고 하소연할 정도로 부도확산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통계적으로 봐도 부도는 급격히 늘고 있다. 한보사태로 지난 1월중어음부도율이 지난 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후 15년만에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1월중 전국의 어음부도율은 0.26%, 서울은 0.19%였다. 물론 부도가 급증한 것은 한보부도여파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중소·대기업 구분없이 자금악화설에 시달려한보부도 전날인 1월22일까지의 서울지역 어음부도율은 0.11%로 지난해 12월 0.12%보다 오히려 0.01%포인트 낮았으나 한보부도 당일인 23일엔 0.40%로 뛰어올랐다. 이후 매일같이 부도율이 높아져31일에는 0.49%까지 치솟았다. 특히 설연휴를 앞둔 지난 3일에는65개 업체가 부도처리되는 상황이 빚어졌다.물론 부도의 일차적인 이유는 경기불황 탓이다. 그러나 더 설득력있는 이유는 극심한 경기위축과 한보부도사태로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끌고가기가 속수무책이라고 중소기업사장들은 하소연한다. 일감이 없는데다 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려워 이중고를 겪고있다고 말한다. 오직 쥐고있는 어음이부도나지않기만을 바라고만 있어야한다.최근 한국 IPC 멀티그램 등의 도산에 이어 용산전자상가의 최대양판점인 아프로만이 부도를 낸 것도 따지고 보면 연쇄부도 때문이다. 이같은 연쇄부도파문은 계속돼 멀티그램과 아프로만에 물려있는 세양정보통신도 지난 12일 마침내 부도처리됐다. 용산전자상가에서 전자부품을 판매하는 김원식사장은 이미 부도를 낸 한국IPC및 아프로만과 거래하고 있는 업체가 용산전자상가내에 5백여곳이넘어 부도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있다고 설명했다.서울 문래동 독산동 등에 몰려있는 영세기업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않다. 어음을 끊기도 받기도 이제는 짜증나기만한다. 그동안 쌓은 신용을 바탕으로 은행에서 3~4천만원의 운전자금을 융통해 보려해도 높은 문턱만 확인하고 돌아서야한다.『요즘 어지간한 직장에 다니는 월급쟁이도 여러 은행을 이용할 경우 1억원의 목돈을 손에 쥘수 있어요. 그런데 명색이 1년에 15억원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사장은 담보없이는 단돈 2천만원도얻어쓰기 힘들어요.』(가리봉동에서 금속가공업을 하는 K사장)『첨단CNC 와이어 방전가공기 한대를 수입하기위해 설비투자자금1억원이 필요하지만 주거래은행에서 시기가 좋지않다고 무조건 미루자고 합니다. 얘기를 들어볼 생각도 안해요. 한보에는 사업성 검토없이 수조원의 뭉칫돈을 쏟아부었던 은행이 아직도 반성하는 빛이 안보여요.』 인천 남동공단에서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P사장은기업이야 죽든말든 분위기만 탓하는 은행직원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오랫동안 거래한 기업인만큼 사업성검토나 해본후 대출을 결정해도 충분하지않느냐는 것이다. 사업을 계속할 의욕이 없어진다는말이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다.금융기관들은 풍부한 자금을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는 기업에 대출해주기 보다는 아예 돈떼일 염려가 없는 채권등 유가증권에 투자하고 있다. 부도 도미노속에 3년만기 은행보증채등 시중실세금리가안정세를 유지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돈이 필요한 곳으로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금융기관 사이에서만 계속 겉돌고 있는 것이다. 넉넉한 시중자금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사장들은 처 8촌에까지 손내밀면서 급전을 조달하고 있다.어음할인도 여의치 않다. 한푼이 귀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어음할인도 대출과 마찬가지다. 다만 선이자를 뗐을 따름이다. 물건을 납품하고 받아쥔 어음은 금융기관할인을 통해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보부도사태이후 어음할인이 여의치 않아 운전자금을대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은행에서는 할인한도도 차고 추가담보도 없어 어렵다고 하고 종금사들은 대출을 무조건 꺼리고 있다. 최근 들어선 파이낸스회사들마저 부실채권이 쌓이면서 영업을 꺼려 중소기업사장들이 어음을 들고 찾아갈 데가 없다. 사채시장도 마찬가지다. 명동에서 10년째 사채업을 하는 황모씨는 이제는 아무리 높은 금리를 준다해도 10대그룹 이외의 어음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소기업 사장들을 더욱 서글프게 하는 것은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따로 일선기관 따로」인 현실이다. 말로만 지원이 있을뿐 산업현장에 돈이 안간다는 얘기다.한보부도에 따른 연쇄부도를 막기위해 정부는 각종 지원책을 약속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뒤따르지 못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보철강에 벽돌을 납품해 온 A사는 2억5천만원의 진성어음에 대한확인서를 자금관리단으로부터 어렵게 발급받아 주거래은행을 찾았으나 『무담보대출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 회사의K사장은 정부의 각종 자금지원책은 공허한 구두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금융기관들 대출보다는 유가증권에 투자중소기업청의 집계에 따르면 한보의 부도여파로 피해를 입게되는중소기업이 7백20개에 이르고 피해액만도 4천5백억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청 한보부도 관련 애로신고센터의 김시중과장은 『물건을 대량 납품하고도 어음 한장 제대로 못받고 부도위기에 직면해 발을 동동 구르는 기업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한다.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부도 도미노가 진정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않는다는 점이다. 한보부도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될 때까지는 금융기관들의 대출기피현상은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은 지급준비율이 인하되는 오는 23일부터 중소기업에 대한 어음할인금리를 1.0%포인트 인상키로 해 해당기업의 경영난이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이에따라할인어음대출 무역어음대출등 총액대출한도와 연계된 중소기업 대출금리는 최고 연 11.5%에서 연 12.5%로 인상된다. 은행들은 지준율인하로 총액대출한도가 줄어 가산금리확대가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했다.일부 자금전문가들은 자금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또 다른 중견업체가 희생되고 다시 주변의 중소기업들이 쓰러질 경우 한보부도의 후유증이 갈수록 증폭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도 도미노를 막기 위해선 금융기관에 고여있는 돈들이 기업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정부도 실효성있는 지원책이 될 수 있도록 사후관리를 철저히해야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불신이 해소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건전한 금융관행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