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계의 황제, 기업의 생사여탈권자, 무소불위의 제왕」. 은행장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공통점은 은행장의 파워가 막강하다는 점. 주인이 없는 은행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은행을 주무르는 사람이다. 적어도 일반인과 은행원들에겐 그렇다.실제가 그렇다. 공식적인 업무추진비도 월 1천만원이 훨씬 넘는다.대형 시중은행장의 경우 20조원이 넘는 여신을 관리한다. 1만여명의 직원들을 쥐락펴락한다. 4백여개의 점포도 「내손안에 있소이다」다. 아무리 큰 대기업이라도 막 대하진 못한다. 중견 중소기업들이 절절 매는건 물론이다. 공적대우도 일반회사오너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 그대로 막강한 자리다. 이렇게 천하의 은행장들도 「천적」은 있다. 이른바 정치실세등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 앞에만 서면 은행장들은 한없이 작아진다. 너무 작아져 초라해 보일 정도다. 한보사태만 봐도그렇다. 한보사태는 따지고 보면 정태수와 정치실세들의 놀음이었다. 그런데도 은행장들이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됐다. 신광식 제일은행장과 우찬목 조흥은행장이 철창에 갇혔다. 김시형 산업은행총재와 장명선 외환은행장은 철창행을 면했지만 스타일을 구길대로 구겼다.물론 자본금 9백억원인 한보철강에 3조5천억원을 퍼주었던 은행장들이 책임을 면할순 없다. 그러나 이른바 「외압」앞에 꼼짝못하는은행장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그리 매도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현재와 같은 관치금융이나 정치금융 시스템하에선 특히 그렇다.그렇다면 일반인들에겐 하늘같이만 느껴지는 은행장들이 외압앞에선 힘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한없이 작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하고 있어서다. 국내은행엔주인이 없다. 반면 은행의 힘은 무궁무진하다. 한순간에 기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맘만 먹으면 「떡고물」도 얼마든지챙길수 있다. 이런 황금어장을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내버려둘리만무하다.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한 정치실력자들로선 특히 그렇다. 어떡하든 은행장이나 임원들을 자기사람으로 만들어 요긴하게써먹을 필요가 있다. 실세들이 은행장이나 임원 선임과정에 깊숙이개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은행장은 물론 임원이라도 해먹으려면 이들의 힘을 업어야한다는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은행장이 되기위한 공정가격은 30억원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은행장이 되는과정부터 실세들에게 「신세」를 지는만큼 「외압」앞에선 한없이작아질 수밖에 없다.한보사태로 구속된 신광식 제일은행장의 「행장입성기」를 보자.작년 5월 이철수 제일은행장이 검찰에 전격 구속됐다. 후임행장으론 이행장으로부터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받은 신광식 전무가 거론됐다.(지난 93년 이 행장은 행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당시 상무서열 6위였던 신씨를 전무로 전격 발탁, 화제를 낳았다) 분위기상못될 것도 없어 보였다. 당시만해도 은행장 후보 추천위원회 시절이라 자행 출신이 행장자리를 승계하는게 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은행감독원에서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온것. 은행감독원은 이철수행장이 구속되고 제일은행이 거액의 부실여신을 떠안은데 대해 전무도 연대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들어 신전무가 행장후보로 추천될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을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용진 은감원장부터가 앞장섰다. 비토권을가진 감독당국의 의지가 이런 까닭에 신전무의 「대권의 꿈」은 물건너가는 듯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올시다」였고 신전무는 「적격판정」을 받았다.이유는 간단했다. 신행장은 금융계 고위인사로는 몇안되는 PK(부산경남출신)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경남 통영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검증은 되지 않지만 PK실세들의 후원이 대단했을건 뻔한 일이다. 이런 배경만 봐도 애시당초 은감원의 「거부권행사운운」은 치기에 불과했다.(은감원은 당시 청와대나 재경원등과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합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이었다. 이렇게 은행장이 된 신행장도 은행장 타이틀을 단지 채1년도 안돼 자신을 행장으로 만들어준 「후견인」에 끌려다니다결국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예는 얼마든지 있다. 주인이 확실한 후발 시중은행장 몇명을 제외하곤 모든 은행장이 다 그렇다고 보면 된다. 작년 11월 구속된 손홍균 서울은행장도 예외는 아니다. 손 행장의 스토리는 지난 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이광수 당시 서울은행장이 수출입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임엔 손홍균 당시 수석전무가 유력하게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김준협 차석 전무가 연공서열을 뛰어넘어 대권고지에 올랐다.은행내부에 알려진 이유는 이렇다. 당시 손전무는 5공당시 금융계의 황제로 군림하던 L모씨의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김전무는6공의 새로운 실력자로 노태우대통령과 인척관계인 K모씨를 등에업었다. 지는해와 뜨는해의 싸움이었는데 결과는 뻔하지 않았겠는가.(서울은행 김모지점장) 한번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손행장은94년 1월 장영자사건으로 김영석 행장이 물러나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낸다. 경영쇄신의 명분으로 신복영 한국은행부총재(현 금융결제원장)의 영입이 유력한 상태였지만 은행장추천위원회는 손행장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만다. 역시 문민정부들어 실력자로 부상한 정치실세의 힘이 결정적 도움이 됐다는 후문이다. 실세들의 영향력이 은행장 선임과정에만 그치는건 아니다. 재임기간 내내 이들은 은행장의 「대부」로 군림한다. 은행장들로선 채무의식을 버릴수 없다. 대출청탁이고, 인사청탁이고 들어주지 않을래야 않을 재간이 없다. 수시로 찾아뵙고 성의를 표시해야하는건 물론이다. 만일 실력자들의 뜻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간 그날로은행장자리는 끝이다. 돈을 만지는 성격상 은행장들치고 「털어서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물증을 찾기도 쉽다. 사정당국에서는 은행장에 대한 뒷조사를 수시로 실시한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잡아들일 수 있는게 은행장이다. 문민정부 들어서만도 18명의 은행장이 중도퇴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구속된 이철수 제일은행장이나 손홍균 서울은행장의 「진짜 구속이유」를 두고 뒷말이 무성한 것만 봐도 그렇다.비록 후견인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는다해도 후견인이 내부 파워게임에서 밀리거나 시대상황이 바뀌면 은행장도 자동 벼랑끝으로 밀리고 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 사정바람이 불어대고 은행장들이 줄줄이 물러나는 것이 대표적이다. 문민정부들어서도 사정칼날이 시퍼렇던 시절인 93년봄 김준협 서울은행장 이병선 보람은행장 박기진 제일은행장 안영모 동화은행장 등이 줄줄이 물러났다.이들이 6공시절 정치실세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 거래기업은 물론 금융계에서도 뒷말이 무성했던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이들을 몰아낸 진짜 목적은 「금융계 장악」이었다는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비록 정권교체기가 아니더라도 실력자들의 맘이 바뀌면 은행장들은 파리 목숨처럼 떨어지고 만다. 지난94년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P모씨와 가깝다는 이유로 전격 경질된 김영빈 수출입은행장이 단적인 예다.이처럼 천하의 은행장들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있는 후견인들에겐 꼼짝하지 못한다. 이의 일차적 책임은 물론 은행과 은행장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하는 실력자들에게 있다. 그렇다고 은행장들이 무한정 면책받을수 있는건 아니다. 아무리 센 압력이라도 은행장들이 과감히 「노」라고 말할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려면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도록」 떳떳해야하고 소신과 배짱도 있어야한다. 이형구 전산업은행총재가 검찰수사에서 보여준 「소신」을총재 재임시절 보여줬더라면 한보사태가 이처럼 커지지는 않았을것으로 은행원들은 아쉬워하고 있다.이형구 전총재는 검찰조사에서 「내가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라면수천억원의 특별융자를 정태수씨같은 사람에게 해 줬겠느냐」고 진술하고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행사한 인물을 댈테니 받아 적으라면서 검찰도 깜짝놀랄 수준의 실력자이름을 진술했다. 그러자 검찰은서둘러 이씨를 귀가시키고 은신토록 방조했다는 정보를 갖고있다.(정동영 국민회의대변인 주장)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은행장들이 외압을 거절할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채 은행장 개인의 소신에만 기대하는건 한계가 뻔할 수밖에 없다.은행경영진이 외부압력에 대항하지 못하는 까닭은 물욕탓도 있겠지만 은행경영진의 자리가 외압에 굴종해야 유지된다는 생각탓이다.한보사태처럼 난쟁이 은행이 거인기업을 지원하는 코미디를 연출하지 않으려면 과감한 금융개혁을 통한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는게필수적이다.(김병주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