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당진군은 80년대까지는 어느 모로 보나전형적인 시골 동네였다. 적어도 주변에 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는그랬다. 주민들의 생업은 농업과 어업이었다. 그런 당진이 90년대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서해안 시대」를 내세운 정부가이 지역에 크고작은 공장을 유치하면서 군 전체가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특히 한보철강이 당진제철소를 지으면서부터는 탈농촌화가 두드러졌다. 인구 13만여명의 자그마한 곳에 공장부지만도 1백만평이 넘는 초대형 공장이 들어서니 그럴 만도 했다.한보철강이 한창 공사를 진행중일 때는 건설인력만 1만여명 이상을투입했다. 자연 당진에는 인력난이 심화됐고 농사를 짓던 농부들도하나둘씩 건설현장으로 빠져나갔다. 농사짓는 것에 대해 무력감에젖어있던 사람들에게 한보철강은 일종의 돌파구였던 셈이다. 그들에게 한보는 새로운 희망봉이었고 건설현장 취직은 「시골티」를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그러나 순박한 당진 사람들의 꿈은 지난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로 무너지면서 무참히 짓밟혔다.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한결같이 한보철강이 무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되뇌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그렇게 허망하게 쓰러질 줄은 몰랐다는 얘기다. 특히 지난해 연말부터 위태롭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설마했단다. 한보철강측 역시 아무 일없을테니 아무 걱정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후문이다. 주민 하모씨(당진군 읍내리)는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다가 일당을 많이 준다는 소리에 그만두고 한보철강에서 일했는데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대전에서 중소기업에 다니다 1년전쯤 퇴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역시 한보현장에서 일했던 임모씨(당진군 송악면)도 『정식직원이 아니었던 까닭에 공사가 부도로 중단돠면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렇지만 일자리를 잃은 이들 한보철강 건설근로자들은 당진 현지에서는 그래도 나은 편에 속한다. 당장 돈벌이가 안돼 생활에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거액을 손해볼 처지에 놓인 상인이나 하청업자들에 비해서는 피해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 특히 한보만 쳐다보고 장사를 해온 일부 상인들은 부도 이후 감당하기 힘든 충격에 아예 몸져눕는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다.◆ 피해 상인들, 생계 곤란으로 밤잠 못이뤄한보철강 정문 부근에서 식당을 운영해온 김모씨의 경우 외상값이5천여만원이나 되는데 받을 가망이 없자 식당문을 걸어잠근채 약기운으로 버티고 있다. 또 당진시장에서 야채상을 경영하는 이모씨역시 그동안 한보철강 부근 10여개 식당에 야채를 공급해오다가 이번 부도여파로 9천여만원의 외상값을 받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있다. 이모씨는 밤에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괴로운 나날의 연속이라고 토로했다.그동안 한보철강이나 하청회사들과 직간접적으로 거래해온 건재상,의류상, 숙박업자 등 다른 상인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심지어 동네슈퍼나 쌀가게도 예외가 아니다. 한 슈퍼는 간식용으로 제공했던빵값만 9천8백여만원 어치나 떼일 위기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에대해 이들 피해 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보철강을 끼고 장사하지않으면 지역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한보철강은 절대적인고객이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당진시장에 있는 웬만한 야채상들의 경우 한보철강쪽에 납품하는 물건이 전체의 80% 가까이 됐었다는 것.중소규모 협력업체들의 피해액도 심각한 수준이다. 부도 직전 한보철강의 전체 협력업체는 4천7백여개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당진 관내 업체수는 1백여개로 파악되고 있다. 군의규모로 볼 때 웬만한 업체는 거의 대부분 참여했던 셈이다. 그런데지금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업체들의 대부분이 거래를하면서 공사대금을 어음으로 받았다는 점이다.특히 진성어음보다는 주로 융통어음을 받았다. 융통어음은 일반적으로 부도 등 발행사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현금으로돌려받기가 어렵다. 발행사가 금융기관의 지급보증이 없는 상태에서 발행하는 까닭에 책임질 곳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도 융통어음을 받았던 업체의 경우 아무런 대책없이 피해액을 고스란히떠안고 있다.한보철강 부도여파로 충남지역의 상인과 협력업체, 금융기관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액은 2천7백70억원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를 세분하면 당진군 관내 상인과 업체가 5백58억원, 충남도가 9백51억원의피해액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머지 1천8백11억원은 지역 금융기관이 손해를 본 액수다. 그러나 이 가운데 지금까지 보상된 것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금융기관 부실채권은 그만두더라도 상인과 협력업체들의 피해액에대한 지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금지원을 맡고있는 채권금융기관의 자금관리단이 진성어음을 갖고 있는 경우에한해 확인서를 발급해주고 이를 갖고 거래은행에 가면 약간의 대출을 해주는 정도다.그러나 대출도 어음에 적힌 액수의 20~30%에 불과하고 최근에는 확인서를 들고가도 아예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피해업체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한보철강 거래은행에서 꺼리기 때문이다. 당진경제를 얼어붙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융통어음을 갖고 있거나 외상으로 거래한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피해를 본 상인이나 업체의 거의 90%가 융통어음을 받거나 외상으로 거래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자금지원이 없는 상태다. 이에 따라 당진군청이 나서서 군수명의로 한보철강과 자금관리단에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해달라는 내용의 협조공문을 보냈지만 성과는전무한 실정이다. 경영을 떠맡은 포철과 자금공급을 책임지고 있는자금관리단에서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융통어음·외상거래, 아무런 대책 없어당진은 한보철강 부도로 군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업체들의 직접적인 피해 외에 재정수입 면에서도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추산되는차질액은 군세수와 공유재산매각액을 합쳐 1백99억원이다. 한보철강이 1월말까지 도에 내기로 돼 있는 세금 3백80억원을 내지 않고있어 이 가운데 1백14억원을 군교부금으로 받을 꿈이 무산될 위기에 빠져 있다. 현재로서는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막막한 실정이다.또 한보철강과 계약을 맺었던 당진제철소 B지구내 군유지에 대한공유재산매각도 일이 꼬이면서 여의치 못하다.매각대금으로 받기로 했던 액수는 85억원이다. 당진군청 지역경제과의 한 관계자는 『재정수입이 당초 예상보다 2백억원 가까이 줄어들면 군살림을 꾸려나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하루 빨리 사태가 해결돼 군 전체가 제자리를 찾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니 인터뷰 / 김낙성 당진군수"정부·자금관리단 특별지원 절실"▶ 한보철강 부도 이후 50일 가량 지났는데 당진경제는 어떤가.처음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지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영세업체들의 피해가 크다. 협력업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3월말까지 특별지원이 없으면 줄줄이 부도로 이어질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한다.▶ 당진군 차원의 자구노력도 필요할텐데.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군의 재정이 넉넉해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못한 형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여기저기찾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할 뿐이다. 정부나 자금관리단의 특별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나 자금관리단의 반응은 어떤가.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얘기를 한다. 지난번에 재경원장관과 통상산업부장관이 당진에 내려왔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아직 바뀐것은 별로 없다.▶ 자금관리단에서 자금지원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서울에서 자금관리단이 내려와 당진제철소 내에 피해자 접수창구를마련해 놓고 있다. 일부 진성어음 소지자에게는 대출을 해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금지원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다. 빙산의 일각이라고나 할까.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어음도 적지 않은데 새어음으로 바꾸는 것도 무척 힘들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인가.한보철강 정상가동과 B지구 건설공사 재개다. 그래야만 침체에 빠져 있는 당진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 5천만원 이하 소액피해업체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대금을 결제해줬으면한다. 정말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