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크라이슬러식 회생방안에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도 포함돼있다. 크라이슬러가 좌초위기에 몰렸을 때 미행정부는 이회사의 채무보증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등 경제적 파급효과를 줄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그러나 우리정부는 세계무역기구출범이후 정부지원의 한계를 들어현재까지 어정쩡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행정부가 크라이슬러를 지원할 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재계는 이같은 정부입장에 불만이 많다. 정부가 기아지원에 나설 경우 국제적 통상압력등 피해가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방치할 때 예상되는 연쇄부도 등 국내경제적 피해가 오히려 엄청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기아사태의 크라이슬러식 해법은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을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기아그룹이 침몰위기에 몰리면서 한국자동차산업전반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되고 있다. 자칫 기아사태가 악화될 경우 부품업체의 연쇄도산 등 경제전반에 대한 파장도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마디로 자동차산업의 한축을 담당했던 기아그룹이 좌초하면서 우리 경제는 최대위기에 봉착했다.선진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시차는 있지만 미국, 일본도 70년대 후반 자동차산업이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다. 크라이슬러와 마쓰다가 무리한 사업다각화와 오일쇼크 등이 겹치면서 파산위기에몰린 것이 좋은 사례다. 두 기업은 위기를 맞아 과감한 감량경영과경영혁신 등을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이 과정에서 정부와 채권은행단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있었다. 기아가 자구책을 통해 홀로서기를 할수 있을지 아니면 제3자에게 인수될지 현재로선 미지수지만 크라이슬러와 마쓰다는 하나의 해법을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크라이슬러는 기아가 홀로서기를 위해 가장 먼저 벤치마킹해야할기업이다. 이 회사는 70년대말 파산직전까지 갔다 위기를 극복하고현재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역전드라마는 전설적인 전문경영인인 리 아이아코카와 미국정부가 연출했다.미국 차업계의 빅3중 하나였던 이 회사가 위기에 봉착한 것은 78년. 당시 크라이슬러의 경영상태는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제2차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로 자동차판매는 급감했고 일본의 소형차공세 또한 만만찮아 경영은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적자규모는갈수록 늘어나 78년 적자액은 11억달러에 달했다. 급기야 미국 정가 주변에서는 크라이슬러 도산에 따른 대량실업에 대한 우려감이증폭됐다. 미국자동차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인 것은 물론이다.이런 상황에서 리 아이아코카가 새로 회장에 취임했다. 아이아코카는 취임하자마자 감량경영과 대대적인 경영합리화조치를 취했다.그는 맨먼저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묶어 솔선수범을 보인 뒤 종업원의 임금도 일률적으로 10%인하했다. 35명의 부사장중 33명을 해임하고 근로자도 8천5백여명을 해고했다.유럽과 호주의 생산라인을 매각해 해외사업을 과감히 정리한 것은물론 군수산업에서도 손을 뗐다. 이와함께 연산 2백50만대 규모였던 손익분기점도 1백10만대로 낮추어 사업구조를 수익성 위주로 재편했다.회사가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수하고 대대적인 경영합리화를추진하고 나서자 노조도 적극 보조를 맞추었다. 미국자동차노조중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던 크라이슬러노조는 79년 3년간 2억3백만달러의 임금을 삭감하자는 회사측 안을 수용했고 80년에는2억4천만달러에 달하는 복지비삭감도 동의했다. 크라이슬러노조의이같은 자기희생감수는 미국 노사관계를 변혁시키는 계기가 됐다.미국정부도 크라이슬러 살리기에 뛰어들었다. 미 행정부는 크라이슬러가 파산할 경우 대량실업이 우려되고 금융시장 또한 교란될 우려가 높자 15억달러에 달하는 이 회사 채무 보증안을 의회에 상정,통과시킨 뒤 구제에 나섰다.미행정부는 채무보증안이 통과되자 크라이슬러에 추가자구노력을요구하고 다른 채권단들에도 크라이슬러구제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채권은행단에 5억달러를 신규융자토록함은 물론 지방정부에도2억5천만달러를 지원하도록 권고했다. 부품업체에 대해서는 1억달러 규모의 크라이슬러 주식투자를 요구, 관철시켰다.◆ 노사간 자구노력 함께 힘써야신차개발의 성공도 크라이슬러 회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료절약형 2200cc급 K카가 히트를 치고 84년에 투입한 미니밴 캐러번과 보이저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크라이슬러는 기사회생했다.80년 17억1천만달러에 달했던 적자는 감소추세를 보이다 82년 흑자로 돌아섰다. 흑자액은 1억7천만달러였다. 83년에는 융자금 12억달러를 7년이나 앞당겨 조기상환,미국 금융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크라이슬러는 기사회생했지만 위기는 여기서그치지 않았다. 84년 23억달러에 달하는 기록적인 흑자를 기록했던크라이슬러는 80년대 후반들어서면서 경기침체와 일본업체의 미국시장 공략이 거세지면서 매출이 급감했다. 비자동차사업부분을 매각하고 신형중형차 LH카 프로젝트를 추진, 위기를 타개했다. 이같은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둬 93년 시장점유율은 전년도 13.1%에서14.4%로 껑충 뛰어올랐고 38억3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파산직전까지 몰렸던 크라이슬러의 극적 회생은 자구책을 통한 회사의 홀로서기, 노조의 적극적인 동참, 정부의 효율적인 지원책이한데 어우러져 이뤄졌다. 자구책 마련을 망설이고 있는 기아그룹과사태수습에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정부는 한번쯤 크라이슬러의 역전드라마를 볼 필요가 있다고 재계관계자들은 지적한다.크라이슬러와 함께 일본 마쓰다자동차의 위기극복도 눈여겨 볼만하다. 1931년 모터사이클엔진을 탑재한 3륜트럭을 생산하면서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마쓰다는 세계 최초로 67년 저공해 로터리엔진을 개발,도요타와 닛산추격에 나섰다. 로터리엔진은 전통적인 엔진을 탑재한 다른 메이커 승용차보다 비록 연료효율은 낮아도 상대적으로낮은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이점이 있다.70년 경영권을 이어받은 창업자 손자 고헤이 마쓰다는 73년 로터리엔진을 탑재한 승용차가 미국 환경보호국의 오염물질 기준을 통과한 것을 계기로 미국수출을 본격 추진했다. 다소 연료는 많이 들더라도 공해물질 배출이 적어 마쓰다 승용차는 미국소비자들로부터인기를 끌었다. 고헤이 마쓰다는 미국수출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연간 1백만대 수준의 생산설비 확장을 추진하는등 공격경영을 과감히펼쳤다.그러나 로터리엔진의 성공 뒤에는 마쓰다의 불운 또한 숨어 있었다. 73년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로터리엔진의 가장 큰 맹점인 연료의 비효율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 수출무대였던 미국소비자들의 외면이 두드러져 수출물량은 급감했고 재고는 눈덩이처럼불어났다. 급기야 75년에 1천6백71억엔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마쓰다는 좌초위기에 직면했다.마쓰다는 비상경영체제에 돌입, 대대적인 감량경영에 들어갔다. 보유부동산과 유가증권 매각을 추진하는 한편 생산직사원의 감원도추진했다. 3만7천여명의 근로자중 5천여명을 해고하고 관리직 사원의 영업직 배치를 실시했다. 크라이슬러와 마찬가지로 경영진의 급여삭감과 상여금동결, 생산직의 임금삭감이 이뤄졌다. 노사간에 눈물겨운 자구노력이 펼쳐진 것이다.주거래은행과 정부의 지원도 동시에 진행됐다. 마쓰다의 주거래은행인 스미토모은행은 최고경영자는 바꾸지 않은 대신 이 은행 도쿄지점장인 무라이를 마쓰다부사장으로 파견, 은행관리에 들어갔다.이와동시에 스미토모은행은 마쓰다에 제품개발전략수정, 인력감축및 재배치, 경영안정화를 위한 자본제휴 등을 촉구했다.◆ 아이아코카, 취임후 자신 연봉 묶어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뒤 마쓰다에 자금지원이 이뤄졌다. 스미토모은행은 긴급구제자금 3백억엔을 지원하는 한편 마쓰다가 채무를 지고 있는 다른 금융기관들에도 자신들이 보증을 설테니 대출금 회수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함께 마쓰다로부터 5천4백만달러에 달하는 유가증권과 부동산을 매입하고 연간 3천여대의 트럭과승용차를 구입, 마쓰다를 도왔다. 스미토모은행은 미국 포드사와의자본제휴를 주선, 마쓰다의 숨통을 터주었다.일본정부는 각종 법개정을 통해 마쓰다의 홀로서기를 지원했다. 미국정부가 크라이슬러회생을 위해 전면에 나선 반면 일본정부는 뒷전에서 측면지원방식을 택했다. 스미토모은행에 대해 정부가 암묵적으로 지불보증을 해주고 포드출자를 위해 외국인 투자관련 법률을 개정했다.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마쓰다는 1년만에 극적으로 경영이 정상화됐다. 76년 1천55억엔의 흑자를 기록한데 이어 78년에는 새롭게 개발한 로터리엔진을 탑재한 RX-7 스포츠카가 히트를 치면서2천6백35억엔의 흑자를 냈다. 마쓰다는 80년에 채무를 대부분 해소하고 완전정상화됐다.그러나 마쓰다는 지난 94년이후 내수부진으로 국내 생산대수가 과거 절반에 불과한 70만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다시 위기를 맞은끝에 96년 미국 포드사에 경영권이 넘어가 충격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도 주거래은행은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스미토모은행은 마쓰다의 경영이 악화되자 아예 경영권 자체를 넘기는 것이 유리하다고판단, 미국 포드사에 추가지분 인수를 요청했다.크라이슬러와 마쓰다의 사례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스웨덴 사브의 변신노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만대 정도의 작은 생산규모인 이 회사는 지난 86년이후 주력시장인 미국에서 판매가 급감하자 경영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미국 GM출신의 로버트 핸리씨가 사장으로 영입돼 개혁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핸리사장은 지난해 사장에 취임한 뒤 규모를 확대하지 않고 라인업을 축소하는등 경영효율성을 제고하는데 혼신의힘을 쏟고 있다. 미국 GM사에 지분절반을 매각하는 한편 소형차생산방침도 철회했다.크라이슬러와 마쓰다의 회생사례는 기아사태에 해결에 단초를 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바가 크다. 두 회사는 우선 철두철미하게 감량경영과 경영합리화를 통한 홀로서기를 모색했다. 정부와 은행권의지원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기아는 자동차부문을제외하고 나머지는 미련없이 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재계관계자들은 지적한다.정부의 자세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일본정부는 비록 개입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크라이슬러와 마쓰다의 회생에 도움을 주었다. 주거래 은행에만 맡겨놓고 나몰라라하고 있는 우리 정부와는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크라이슬러와 마쓰다의 회생스토리는 기아사태 수습에 타산지석으로 삼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