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초 이기호 노동부 장관은 도산한 기업의 근로자들에게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지급하기 위해 2천억원에서 3천억원 규모의 「임금보장기금」을 만들겠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이장관의 발언에 대해 기업과 국민의 세금으로 개별업체의 근로자체불임금을 보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원론적인 문제제기에서부터 가뜩이나 기금이 난립한 현실에서 국회나 타부처와 한마디 상의없이 언론에 흘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비난이 가해졌다. 유사한 공공기금을 통폐합하겠다는 정부의 기금운용기조와어긋날 뿐만 아니라 재원을 부담할 국민과 기업의 양해를 얻는 노력이 없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이장관의 발언은 기금을 바라보는 관료들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별회계나 일반회계와의 차별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현안이 생길 때마다 다양한 명목의 기금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개발연대」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같은 「행정편의적 발상」이 기금난립의 주범이라고 재정학자들은 지적한다.또한 독자적인 사업집행자금을 마련하겠다는 「부처이기주의」가근저에 깔려 있다.물론 기금은 「세입내 세출」이라는 예산원칙에서 벗어나 행정부가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소모적 정치싸움에 시간을 낭비하여 예산안 심의일정을 넘기기 일쑤고 그나마 하루만에졸속으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기금의 유효성을 부정키 어렵다. 사용처나 집행일자, 금액이 정해져 있는 일반예산으로는 할 수 없는 사업을 신속히 집행할 수 있다는게 관료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기금을 국회통제에서 벗어난 재정활동으로 바라보는 관료들의 시각은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양산한다고 황성현 KDI(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은 지적한다.무엇보다 기금의 난립이 큰 문제다. 지난 5월말 현재 운용되는 기금은 모두 74개. 한정된 정부자원을 특정분야에 집중지원하고 예산심의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한다는 기금설치의 의의를 살리기 힘들정도로 난립하고 있다. 특히 국회나 감사원에 보고할 의무가 없는기타기금의 난립은 야당과 여론으로부터 줄기차게 공격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기타기금은 관할부처 장관의 승인만으로도 자금을 집행할 수 있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같은 편의성 때문에덩치가 큰 기금들은 대부분 기타기금으로 분류, 운용되는 실정이다.◆ 덩치 큰 기금은 대부분 기타기금중소기업창업및진흥기금 수출보험기금 국제교류기금 보험보증기금등은 재원조달과 사업성격상 공공기금으로 분류돼야 하나 기타기금으로 분류, 운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다.지난 79년 설립된 중소기업창업및진흥기금은 지난해말 현재 3조9천억원의 재원을 마련했는데 이중 2조4천억원은 정부의 재정융자특별회계에서 연5.5%의 금리로 조달했다. 1조2천억원은 채권발행으로,4천억원은 정부 출연금으로 조성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이렇게조성한 기금을 중소기업의 창업촉진과 경영기반 확충 그리고 구조고도화에 사용한다. 융자는 6.5%에서 8%대.감사원은 정기감사후 이들 기금을 공공기금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했으나 관할 부처에서는 기금마다 설치이유가 있고 나름대로 제기능을 다하고 있다며 국회나 재경원의 통제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반발했다는 후문이다.기금이 난립하면서 유사한 성격을 띤 기금이 부처별로 중복해서 운용되기도 한다. 명칭과 실제 사업집행도 유사한 것이 많다. 또한특별회계와도 차별성을 갖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교통안전진흥공단에서 관리하는 「교통안전기금」과 도로교통안전협회가 담당하는 「도로교통안전협회기금」은 교통안전을 증진시킨다는 목적으로 설치됐다. 농림부가 관리하는 「농수산물가격안정기금」 「농지관리기금」 「종자기금」 등도 설립목적이 유사하다.또한 「과학기술진흥기금」 「한국과학재단기금」 등은 기초과학연구의 진흥이라는 대동소이한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다.기금과 특별회계의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많다. 양곡관리기금과 양곡관리특별회계, 조달특별회계와 조달기금, 국민복지특별회계와 국민복지연금기금, 군인연금특별회계와 군인연금기금, 공무원연금특별회계와 공무원연금특별기금 등을 들 수 있다.기금과 특별회계의 중복현상은 재원의 낭비와 행정부 비대화의 주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우후죽순격으로 기금이 설립되다보니 기금간 재원조달에 편차가 나타나고 있다. 기금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진다.법률구조기금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국민의 법률구조사업을목적으로 설치됐다. 그러나 지난해말 현재 기금조성액은 정부출연금 5억원을 포함한 18억7천만원. 지난해 사업운영비 1백11억원의16%에 불과하여 조성된 기금만으로는 기금설치 목적을 달성할 수없게 됐다. 심지어 도서관 및 독서진흥기금, 국민건강기금 등은 한푼도 조성하지 못한 상태다.반면 정보통신진흥기금은 정보통신업계의 호황을 그대로 반영하여지난 95년 4천2백억원을 조성하기로 했으나 무려 8천7백억원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당초 81억원으로 설정했던 예비비가 57배나 증가한 4천6백억원으로 급증했다.◆ 기금과 특별회계 중복, 행정부 비대화 초래인원과 예산을 지속적으로 팽창시키려는 관료들의 속성은 기금운용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업수행에 충분한 자금을 조성하고도 관행적으로 정부출연금을 받거나 법적 부과금을 징수하고 있다. 문화예술진흥기금은 96년말현재 3천2백억원을 조성했다. 정부출연금1천47억원과 극장이나 고궁 등의 입장료에 포함된 법정 부과금으로마련한 것. 이중 2천6백억원을 금융기관에 예치해서 3백20원의 이자수입을 얻었다. 문화예술의 창작과 보급 그리고 각종 조사연구에충분한 금액이지만 그럼에도 매년 3백억원 가량의 정부출연금을 지원받고 있다는게 감사원의 지적사항이다.이같은 비판에 대해 관료들도 할말이 많다는 입장이다. 재경원에서예산을 일률적으로 편성하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집행예산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즉 볼펜이나 복사용지값 조차도중앙부처 재량으로 구매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부서직할의 기금은 크나큰 매력으로 작용한다고 인정한다. 또한 명칭이 유사하다고 해서반드시 기능이 동일한 것은 아니며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보여도 구체적 집행단계에 들어가면 기금의 수혜대상이 다를 수 있다고 논박한다. 아울러 중복기금이 많은 것은 행정부의 업무영역을두부자르듯이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기금운용의 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기금의설립을 가급적 자제하고 유사한 기금은 과감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의 공병호 소장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불필요한 기금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기금들이 난립함으로써 기업과 가계의 경제활동에 커다란 부담으로 와 닿는다. 이들 기금들은 국회의 통제를 벗어나 관료들이 자의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재정의 효율성을 떨어트린다. 더욱이 기금의재원을 기업들에 전가시키므로 경쟁력약화의 주원인으로 작용한다.기금난립은 또한 「작은정부」라는 세계적 추세에도 어긋난다. 기금축소가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