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에 결혼한 새신부 이성은씨(27·서울 부암동)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일을 다시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을 것 같아서다. 이씨는 94년에 S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외환은행에 들어갔다. 외환은행에서 얼마간 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휴직을 했는데 휴직한김에 좀더 쉬고 싶어 아예 사직해 버렸다. 당시에는 마음만 먹으면일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취직할 생각이었는데 요즘같은 취업난에 결혼한 여자가 쉽게 직장을 얻을 수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이씨는 말한다. 이씨는 답답한 심정에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해볼까 생각 중이다. 그나마 공무원은 시험에만 합격하면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채용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물론 이씨가 「아무 일」이나 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일이라면 당연히 결혼 전에 했던 은행일과 같은 부류의 사무실 일이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주부들이 많이 하는 다단계판매나 보험설계사는 생각지도 않는다. 사무직에 대한 이런 고집은 비단 이씨만의 것은 아니다.취직을 원하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제 1순위로 원하는 직종은 일정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정규 사무직이다. 특히 결혼 전에 사무실에서 일한 경력이 있거나 대졸 여성의 경우 사무직에 대한 집착은더욱 강하다. 그러나 이런 「직장 경력이 있는 고학력 여성」들이들어갈 수 있는 「사무실」이란 거의 없는게 현실이다.◆ ‘다루기 힘들다’ 채용 꺼려회사 사무실에서 전업주부를 기피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다루기 힘들다」는 것과 둘째는 「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것. 재취업하려는 주부들의 경우 집에서 쉰 기간이 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짧은게 보통이다. 자연 비슷한 경력의 다른 직원들보다는 나이가 적어도 2∼3살 많게 마련이다. 이런 주부사원을사무직원으로 뽑을 경우 윗사람들이 대하기도 힘들지만 주위 직원들과의 조화도 문제가 된다. 급여와 승진체계를 어떤 식으로 적용할 것인가도 기업 입장에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이보다 더 큰 걸림돌은 과연 업무수행능력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문제다. 경력이 아무리 좋다해도 직장을 떠나 있었던 기간이 1년이넘어가면 「적응하기가 힘들다」는게 대부분 기업들의 주장이다.하루가 다르게 기술과 정보가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1년 이상씩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던 여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게다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으로는 고등학교나 대학을 갓졸업한 능력있는 젊은 여성도 많은데 왜 굳이 주부를 뽑겠느냐는 입장이다.현실의 벽이 이렇다 보니 사실상 주부가 일반 기업의 사무직원으로재취업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만큼 어렵다. 물론가정에만 있던 주부가 사무직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어서 영어나 일본어 구사가능숙한 경우에는 의외로 쉽게 채용 대상이 될수 있다.모 PR(홍보)대행사의 C부장(42)이 여기에 속한다. C부장은 11년간미국에 살면서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인 식당이나 비디오 대여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외국인 취업이 제한돼 있는 탓에 사무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C부장은 귀국 후눈에 띄는 경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PR대행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했던 덕분이기도하지만 무엇보다도 네이티브에 가까운 영어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전체 직원이 20명 내외인 소규모업체라 회사의 인사체계나주위 직원과의 조화 문제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외국 거주 경험이 없더라도 특별한 기능이 필요한 직종에서 일한경력이 있을 경우 같은 직종으로 재취업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가 출판사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은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결혼 전에 출판사 근무 경력이 있는 주부들이 출판사에 재취업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웅진출판 씽크빅 개발부에서 일하고 있는 신은영씨(32)는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뒀다가 3년만에 재취업한 경우다. 신씨는 웅진그룹계열사인 웅진미디어에서 편집 디자인을 하다가 결혼 후 남편이 지방 발령을 받는 바람에 사직했다. 3년간 지방에서 지내며 아이를낳고 살림만 하다가 서울로 이사오면서 올 5월에 웅진출판에 다시취직했다. 신씨는 『서울에 이사온 뒤 옛날에 알던 직장 선배들에게 연락을 취해 일을 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그 때 마침 웅진출판에서 유아 출판물 편집 경력자를 채용할 기회가 생겨 옛날 직장으로 돌아오게 됐다.최근에는 주부들의 사무직 재취업을 돕기 위한 전문 강좌까지 탄생했다. 이화여대 전문비서교육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는 금융실무과정. 금융기관 취업에 필요한 금융이론과 실무 컴퓨터 사회적응훈련등을 교육하고 있는데 전문대졸 이상의 주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과정은 올 5월에 개설돼 현재 1기생이 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29명이 교육을 받고 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주부들이다. 수강생들의 나이는 26∼38세. 6개월간 교육 수료후 금융기관에 취직 알선까지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수강생을 뽑을 때연령을 40세 이하로 제한했다.이 과정을 개설, 운영하고 있는 EM컨설팅의 황은미 대표는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금융권에 계약직 직원으로 추천해 준다』며 『금융권도 앞으로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계약직 사원을 선호하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도 금융권에서 금융실무과정 이수 학생들에 대한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는 것.이 과정의 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손보현씨(25)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비서로 10개월간 일하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뒀다』며『다시 일을 해보고 싶어 금융실무과정에 참여했다』고 밝혔다.손씨는 춘천에 살고 있어 서울까지 왕복 6시간이 걸리는데도 일주일에 두번 있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열성파다. 『집에만있으면 자기 발전이 없어 주부라도 직장을 가지는게 좋다』는게 손씨가 2년간 전업주부 생활 끝에 내린 결론이다.★ 김성혜 인컴기획 기획팀 부장 인터뷰정보통신 전문 PR 대행사인 인컴기획의 김성혜부장(40)은 주부 재취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결혼 후 몇 차례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쉬었던 적도 있지만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온 덕분에 「아줌마」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김부장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때 부터 대학원 졸업 때까지 「기독교 세계」라는 잡지의 아르바이트 기자로 활동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외국계 은행에 입사했다.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던 김부장은 83년에 남편이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일을 그만뒀다. 처음에는 남편을 따라갈 생각이었지만 여건이 안돼 서울 시댁에 남아 살림을 배웠다고 한다.그렇게 6개월을 지내던 중에 기회가 찾아왔다. 은행에서 알던 사람이 선경그룹에서 영어를 할줄 알고 은행 경력이 있는 여직원을 구한다며 일을 알선해준 것. 남편이 있는 뉴욕지사에서 일하게 된다는 말에 혹해 김부장은 지원했고 정말 「운좋게」 채용됐다. 김부장은 91년 귀국 때까지 선경 뉴욕지사에서 일했다.『선경을 그만두고 귀국한 뒤에는 암에 걸린 시아버님을 간호하느라 정신없이 지냈어요. 일은 생각도 못했죠. 그러다가 시아버님이세운 「패션클래스」라는 수입의류 판매회사를 맡게 됐습니다.』김부장은 1년반 정도 패션클래스를 운영하다가 94년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 『의류를 수입해서 장사하는 일이었는데 힘들기만 하고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는게 김부장의 설명이다. 김부장은 패션클래스를 정리한 뒤 1년 가량 전업주부로 지냈다. 일을 핑계로 조금은 소홀히 했던 아들과 함께 많은시간을 보냈다고 한다.그러나 일복을 타고난 걸까. 우연히 김부장 얘기를 전해들은 인컴기획의 손용석사장이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김부장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외국 기업을 자주 상대해야 하는PR대행사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인재가 필요한데 김부장이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 김부장은 처음에 손사장의 제의를 거절했다.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정보통신 전문 PR대행사에서 일할 수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다 손사장의 간곡한 권유에 용기를 얻어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95년 가을부터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김부장은 그동안 정직원으로 전환됐고승진을 거듭, 홍보 총괄 책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김부장은 『「나이든 주부를 써봤더니 역시 안된다」는 얘기를 듣기 싫어 신입사원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김부장은 또 『중년에 가까운 아줌마를 쓴다는게 인컴기획으로서도 모험이었을 것』이라며 『나이 많은 주부라는 단점과 컴맹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다른 장점을 보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인컴기획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인컴기획에는 김부장 외에도 전업주부로 집에 있다가 재취업한 주부 직원이 2명 더있다. 좋은 경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나 육아문제로 일을그만둔 「여성인력」을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단안」의 결과다. 물론 결과도 만족스럽다고 인컴기획측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