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9월은 환투기의 극치를 보여준 사건이 발생한 시기다.「검은 9월」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역사상 헤지펀드의 위력을실감케한 대표적인 환투기 사건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유럽통화위기는 국제외환시장에서 영국의 파운드화, 이탈리아의리라화 그리고 스페인의 페세타화 등 유럽국 통화의 가치가 급격히떨어지면서 투매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영국은 자국통화를 지키기위해 EMS(유럽통화제도)의 중심기구인 ERM(환율조정매커니즘)을 공식 탈퇴함으로써 유럽통화위기의 절정을 이루었다.이 때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3국은 자국통화의 가치를 방어하기위해 외환보유액의 40%정도를 소모했다. 영국 중앙은행은 3개월 동안 4백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팔면서 파운드화의 가치를 떠받치려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환차익을 노려 동원된 헤지펀드의규모는 국제적인 환투기꾼 조지 소로스가 직접 동원한 1백달러를비롯해 1천1백억달러. 막대한 환투기자금을 동원, 유럽중앙은행들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조지 소로스의 경우 무려 15억달러를 챙긴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에게 맡긴 투자자들에게는 그해68.6%의 전무후무한 고수익을 안겨주었다.유럽통화위기는 독특한 통화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유럽국들은 오는99년까지 단일 통화권 구축을 목표로 과도적인 장치인 ERM을 운영하고 있었다. ERM은 각국 통화간의 기본환율을 설정한 일종의 준고정환율제도였다. 예를 들어 독일 마르크화와 영국 파운드화 간의환율변동은 상하 6% 내에서만 움직이도록 묶어놓는 식이었다. 파운드화가 마르크화와 정한 변동폭을 벗어날 정도로 폭락하는 징후가나타나면 영국중앙은행은 의무적으로 환율시장에 개입해 파운드화를 매입해 파운드화의 가치를 올려야만 했다. 시장에 개입해도 환율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는 굴욕스럽더라도 파운드화를 변동폭이상으로 평가절하기 위한 유럽재무장관회의를 소집, 각국 통화간기준환율을 다시 정하도록 돼 있었다.이러한 ERM을 흔들어 놓은 나라는 독일. 지난 90년 동서독을 통일한 독일은 동독지역의 경제복구를 위해 금리를 연속 인상하였다.독일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인플레를 막기 위해 통독후 2년 동안10차례나 걸쳐 금리를 인상했던 것이다. 독일은 휴지조각에 불과하였던 구동독의 화폐를 마르크화로 바꿔주고, 동독지역에 대대적인투자를 하면서 인플레 해결이 당면한 최대과제로 떠올랐다.◆ 독일 고금리정책, 유럽통화가치 하락 일조이같은 독일의 고금리 정책은 다른 유럽국들의 통화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높은 금리를 보장해주는 독일로 유럽자금이 쏠림에 따라 마르크화는 평가절상되는 반면 다른 유럽통화는 평가절하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다른 유럽국들도 독일과 마찬가지로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에 비해 경제가 약한 유럽국들은 고금리정책으로 인해 더욱 어려워지게 됐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정치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헬무트 슐레징거 당시 분데스방크 총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일 국내사정을 최우선하는 정책을 고수해 나갔다.마침내 92년 9월 8일 핀란드가 마르크와 자국화폐 간 연동제를 폐지한데 이어 스웨덴이 자국통화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단기금리를무려 5백%로 인상했다. 리라화와 페세타화 역시 대폭락하고 파운드화도 대폭락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영국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은 처음에는 비축 자본을 동원해 파운드화를 사들이고, 단기금리를 10%에서 15%로 대폭 인상해 파운드화의 폭락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막대한 규모의 환투기자금에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계속해서 파운드화 폭락을막으려 들다가는 영국의 국고가 바닥날 위기에 몰리게 됐다. 금리를 올려 폭락사태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가뜩이나 심각한 경기가더욱 곤두박질칠 것이 우려돼 금리인상은 포기되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릎쓰고 영국을 ERM에 가입시켰던 장본인이었던 메이저 총리는결국 국내의 거센 정치압력에 굴복, ERM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파운드화 등 다른 유럽통화의 마르크화에 대한 가치폭락으로 요약되는 유럽통화위기는 금융시스템이 가장 발달한 유럽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환투기는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발생할 수있다는 선례를 남긴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