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코네티컷주의 관광 가이드 스티븐 홀트하우젠(49)씨. 90년8월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앗아간 계절」로 기억돼 있다. 명문 대학출신의 은행 대출담당 중견 간부였던 그에게 돌연 해고 통지서가날아온 것. 20여년간 「앞만 보고」 달려 왔던 그는 해고 통지서를받아 들고서야 「바보처럼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을 자책했다고 한다. 무엇을 위해 숱한 나날을 부하직원들과 씨름했고 저녁 휴식과주말을 반납했으며 가정을 소홀히 해왔던가 등.◆ 완전고용 ‘숫자의 장난’그가 잃은 것은 단지 직장과 안정된 수입 뿐만이 아니었다. 가족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역사회에서 누렸던 명예와 자존심까지 한꺼번에날려 보내야 했다. 지역 교회의 공동 재정위원장과 경찰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등 「유지」로서 행세해 왔던 자리들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명망있는 중견 은행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후 1년동안 그는 실업자 수당에 의지하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 다녔다. 그러나 은행에서 버림받은 그를 쉽사리 반겨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간신히 찾은 일자리가 지금의 관광 가이드. 그는 요즘 하루하루 「손님」들이 주는 팁으로 그럭저럭 가족들의 호구를해결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졸 학력의 40대 중반 리나 브라운씨. 그녀는 90년대초 이후 세번이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때마다 요행히도 일자리를얻기는 했지만 「봉급 다운사이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첫직장이었던 정육 포장회사에서 시간당 8.5달러를 받았으나 여기서해고된 뒤 7.25달러의 시간급을 주는 은행 발송직원 자리를 얻었다. 여기에서 또 사표를 강요당하고 옮긴 직장이 시간급 4.75달러짜리 신문 발송회사. 얼마안가 그곳에서마저 버림을 받고는 시간당4.25달러를 받으며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다.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세계 최강 경제대국」 미국의화려한 모습 뒤편에는 이처럼 「낙오병」들의 잔영이 아직도 짙게깔려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지난해 펴낸 <주식회사 미국의 다운사이징 designtimesp=7439>이라는 책에서 고발하고 있다.97년10월말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20여년만의 최저 수준인 4.7%.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수치다.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가 유지됨에따라 임금상승 등 비용 측면에서의 물가 상승(코스트 푸시 인플레)이 걱정된다는 「즐거운 비명」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숫자의 장난」일 뿐, 미국의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온 몸으로 겪고 있는 실생활은 아직도 90년대 초반 대대적으로 단행됐던대량 감원과 해고의 여진과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난 뒤 얻은 새 직장이란 것들이 대부분「명색」뿐 예전의 신명을 되찾게 해줄 곳은 많지 않은게 현실이기때문이다.뉴욕 타임스 조사에 따르면 지난 79년 이후 지금까지 한번 이상 직장에서 쫓겨나 본 사람은 무려 4천3백만명에 이른다. 과거에는 상당수 실직자들이 중소 제조업체나 점포같은 소규모 직장에 근무하던 사람이었으나 9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에 근무하던 고소득 사무직 종사자(화이트 칼라)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성인 10명당 1명 꼴 실직그 결과가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어느 정도의 여파를 미치고 있는지는 몇가지 조사 결과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80년 이후 「해고」의 찬바람을 직·간접적으로 맛본 가정이 미국 전체의 4분의3에 달한다. 본인이나 친지, 가까운 이웃 등이 졸지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어떤 형태이든 그 아픔을 나눈 가정이 이렇게 많다.이중 3분의 1은 가족 중의 한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으며 40%는 친지나 이웃의 실직을 지켜봐야 했다.성인 10명당 1명 꼴인 1천9백만명의 미국인이 직장에서 쫓겨나는바람에 경제적인 「추위」를 겪어야 했다. 이 숫자는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인구를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다. 매년 3백만명이 실직의고통을 당함으로써 강력사건 희생자(2백만명 가량)를 능가한다는「끔찍한」 통계까지 나와 있다.미국인들에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로 각인돼 있는 실직사태가 최근 더 큰 사회적 문제로 주목되고 있는 것은 고학력자들이 직장에서 내몰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해서 대졸 이상 학력자들의 실업이 고졸 학력자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 특히 90년대 들어 연봉 5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자중 실직을 당한 경우가 80년대의 두배 이상에 달하고 있다.이에따라 새 직장을 얻었더라도 봉급이 이전만 못한 경우가 부쩍늘고 있다. 70년대에만 해도 실업은 큰 아픔은 아니었다. 새로 얻은 직장에서 예전 일터 못지않은 봉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미국 노동부가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실직자들이 새로구한 직장에서 과거와 같거나 더 나은 봉급을 받는다고 응답한 사람은 3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어렵사리 새로 얻은 직장이래야 봉급도 적고 후생복지가 빈약한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아예 후생복지가 배제되는 임시직으로 취직하는 경우가 적지않은 실정이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회사는 임시직 채용 알선업체인 맨파워사라는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 회사는 매년 76만7천명 가량에게 「아쉬운 대로 입에 풀칠을 할수 있게 해주는」 임시직 자리를 소개해주고 있다.그 결과는 미국인들의 평균 급여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94년 현재 미국인들의 평균임금은 실질 가격 기준으로 79년에 비해 3%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79년에서 94년 사이에 미국 가계의 평균소득은10%나 높아진 것으로 돼 있으나 그 가운데 97%는 상위 20%의 가계에 돌아갔다는 통계도 있다.이제 미국인들은 삶의 질과 관련해 「눈높이」를 낮추기 시작했다.미국인들의 절반 이상이 「자식들의 생활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뉴욕 타임스가 50대의 공인회계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 등미국내 중상류 전문직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더 비관적인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의 3분의 2가 「자식들이 나보다 나은생활을 할지 확신할 수 없다」고 답했다.하버드대 사회학 교수인 데이비드 도널드는 이같은 조사 결과에 대해 『미국 사회의 발전 원동력은 「열심히 일하면 자신의 세대는물론 자식의 대에서 성공으로 보답받을 수 있다」는 성공의 꿈이었다』며 『미국인들이 이같은 희망을 잃는다면 여간 심각한 국가적문제가 아니다』라고 우려한다.물론 미국인들의 생활이 비관적으로만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사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없어진 일자리보다 새로 창출된 것이 훨씬더 많다. 79년 이후 2천7백만명이 새로운 직업을 얻었다. 경기가조금이라도 여의치 않다 싶으면 가차없이 임직원을 잘라내고 비용절감을 통해 회생의 전기를 마련하는 미국 기업들에는 당연한 일로받아들여지고 있다.이렇게 해서 기업이 다시 경쟁력을 되찾으면 이전보다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하는게 상례다. 기업의 고통이 종업원들에게 즉시 분담되고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기업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면그 과실 역시 지체없이 나누어지는 활력 넘치는 시스템이야말로 미국 경제와 기업들의 가장 강력한 강점임에는 틀림없다.93년부터 95년 사이의 2년여 동안 전체 종업원의 절반 가까운 무려6만여명을 해고했던 IBM이 「다운사이징」과 적극적인 기술개발 등에 힘입어 경쟁력을 회복하자 이후 해고 인원보다 더 많은 8만여명을 새로 채용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미국 기업에는 「공짜」가 없다. 봉급쟁이들이 자신만의 비교 우위로 내세울 수 있는 「실력」을 끊임없이 계발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해고될 것을 각오해야하고, 설령 새 일자리를 얻더라도 쪼그라든 지갑을 감수해야 한다.그것이 미국기업과 미국인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