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한국에서 외채 위기가 논쟁으로 등장할 때마다 「잘못하면이렇게 된다」는 사례로 빗대어지는 나라 중 하나가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당시 외환파동, 천문학적인 인플레이션의「대명사」로서, 한국 언론의 단골 메뉴였다. 어찌나 심했던지 일부 TV방송은 시내 중심가 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을헐벗고 굶주린 빈민들로 묘사하는 몰지각을 연출하기도 했다.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최근 들어 7년이 넘도록 미국 달러와 자국 화폐인 페소 환율을 1대1로 유지시키면서 물가를 한자리수 이하로 잡았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같다. 오늘의아르헨티나 경제계는 아시아 특히 한국의 외환파동과 경제 파탄을우려하고 있는 실정으로 세계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을 실감케하고있다.아르헨티나 경제는 70년대만해도 물가가 연일 50% 이상 치솟고 달러 환율은 매일 1백% 이상 뛰어 올랐다. 그 결과 화폐개혁 당시 달러보다 더욱 가치가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페소레이」는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만인 79년 1백만대 1로 가치가 떨어져 「백만 페소더미 위에서 울고 있는 거지」라는 자조어린 말을 낳기까지 했었다. 그 아르헨티나 경제가 1990년도에 이르러 한국과 정반대로 안정을 되찾게 됐다. 현시점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처지가 뒤바뀌게 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음미해 볼만하다.아르헨티나는 1955년부터 83년 민정이양 때까지 28년동안 17명의대통령이 갈리고 화폐 역시 3번이나 바뀌었다. 새 화폐를 발행할때마다 십단위를 여섯 개씩이나 떼어내야 했다. 즉 매번 1백만대 1로 평가절하를 했다는 얘기다. 동시에 화폐개혁을 단행했던 대통령은 예외없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국민들의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민간정부의 기수가 된 알폰신 전 대통령도마찬가지였다. 알폰신은 민주화 성공이라는 업적으로 1986년 재선됐으나 군부와의 마찰로 인한 반란, 총파업, 외채상환 독촉 등에시달리고 연 인플레이션은 5천%가 넘었다. 결국 그는 임기 만료 5개월전 당시 대통령 당선자였던 카를로스 메넴에게 정권을 조기 이양한채 퇴진하고 만다.◆ 7년이상 미 달러·페소간 환율 1대 1 유지알폰신과 메넴, 두 정치가는 군정 당시 투옥과 망명을 거듭해가며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동지다. 한 사람은 대통령에 당선돼 민주화,언론자유 등은 이루었으나 경제파탄을 책임지고 조기 퇴임했고 또한 사람은 거덜난 경제를 떠맡게 됐다는 점에서 한국의 양김씨와너무나도 흡사하다 하겠다.정권을 조기에 이양받은 메넴은 당시 지불만기를 넘긴 6백60억달러의 순수외채와 2백억달러가 넘는 이자, 만연된 국가재정적자 문제등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동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르만 곤살레스 경제장관을 과감히 경질했다. 그리고 세계금융시장에서 폭넓은지지와 발판을 구축하고 있던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미국통도밍고 카발로를 그 자리에 전격 기용, 아르헨티나 경제를 그의 손에 맡기는 모험을 단행했다. 카발로는 그때 약관의 43세였다.1991년 4월 태환정책을 발표한 카발로 신임 경제장관은 강력한 통화억제 정책을 실시하고 물가안정을 위해 수입문호를 개방했으며시장을 자유경쟁체제로 전환시켰다. 또한 대외적으로 IMF로부터 3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차입하고 92년 만기 외채이자를 백지화시킨브래디 정책에 참여, 아르헨티나 경제 역시 IMF 통제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같은 외채 이자 탕감에는 현지에 뿌리내린 포드, 월마트, J.디어(농기구회사), 나비스코, 코카콜라, IBM 등 미국기업들의 대미 로비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미국금융가에 있는 카발로 장관의 인맥이 가장 큰 몫을 했다는 평가다.카발로 장관은 IMF와 맺은 옵션에 따라 부가가치세를 13%에서 21%로 인상했다. 또 만성적인 재정적자 만회를 위해 12만2천여명의 공무원들을 쫓아내는 한편 국영항공사인 AR를 비롯, 원자력 발전소,전기, 철도, 통신부문을 민영화시키고 38개의 시중은행을 통폐합했다.물론 실업자는 양산됐다. 군정 말기 당시에는 1백만명 수준이었으나 관·공·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불요불급한 인원을대폭 감원하다보니 실업자는 2백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예를 들어대표적 석유산업체인 YPF사의 경우 국영기업 시절에는 6만여명에달하던 직원수가 6천명으로 줄어든 사실에서 이 나라 실업률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이러한 조치에 힘입어 아르헨티나는 지금까지 자국화폐와미국달러의 가치를 1대1로 유지시키고 있으며 재정흑자는 물론 연평균 7.7%의 경제성장에다 3.9%의 인플레율을 기록, 남미개혁정책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국면탈출 위해선 정적·동지 구분 안해카발로 장관이 경제안정을 이루고 외환위기를 극복하기는 했으나지나치게 엘리트 의식이 강했던 까닭에 행정부내에서는 물론 메넴대통령과의 마찰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발로 장관이 97년 6월말까지 7년이 넘게 장기집권을 하게 된데에는 국내 지지보다는 해외금융가, 특히 IMF 등의 지원에 힘입은바 크다 하겠다. 카발로 장관이 사임 압력을 받을 때마다 캉드쉬 IMF 총재 등국제금융가의 거물들이 카발로 지지를 표명, 메넴 대통령으로 하여금 다른 선택을 할수 없게 만들었다.한국 금융위기가 터지자 재경원을 제쳐두고 김영삼 대통령도 믿지못해 대선주자의 연대보증까지 요구했던 IMF의 태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다시 말해 한국경제계는 아직까지 국제 금융시장에서 확실하게 믿을만한 인맥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음이 이번 위기를 통해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지난 94년말 멕시코의 데킬라 파동이 일어났을때 아르헨티나 증시와 외환시장에서도 1백억 달러 이상의 핫머니가 일시에 썰물처럼빠져나갔으나 아르헨티나는 카발로 장관의 발빠른 행보로 도쿄은행과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별다른 문제 없이 넘겼다.국민소득 8천달러에 국민총생산 2천8백억달러 규모를 가진 아르헨티나가 1천억달러에 가까운 외채로 이자상환에 쪼들리는 것은 사실이나 한국처럼 외부의 압력은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의 느긋한 국민성도 있겠지만 정치외교적인 채널을 통해 이같은 문제들을 차분히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점도간과할 수 없다. 경제규모나 교역량을 볼 때 한국이 지고 있는 외채는 아르헨티나에 비해 큰 문제가 될수 없는데도 국가부도를 운운하는 것은 정치력 부족에다 외교부족, 인재부족은 아닌지 심각하게검토해 볼만하다.이번 IMF 파동의 원인과 관련해 한국은 재경원 관계자나 주미대사의 무능을 탓하기 이전에 대통령의 인사잘못을 문제삼아야할 것같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처럼 이해관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인사정책을 펴고 해외전문인력 양성에 주력해야함은 물론이다.메넴은 비록 정적이라할지라도 유능한 인사는 핵심 포스트에 두는정책을 구사, 오랜 불화속에서도 카발로 장관을 7년동안 신임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