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21세기 한국기업의 경영모델은 어떠해야 할까」.IMF(국제통화기금) 한파를 이겨내고 국경없는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기업의 경영 구조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한논의가 요즘 부쩍 활발하다. 이와 관련한 학계나 경영계의 의견은분분하다. 어떤 이는 미국식으로 가야 옳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이는 한국 실정엔 일본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한다.그러나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기업의 경영시스템을 미국식 일본식등으로 단순히 규정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지적하고 있다.특히 한국기업의 경영 틀을 미국식이니 일본식이니 하는 일정한 「정답」을 정해 놓고 그것에 꿰어맞추려는 시도에 대해선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유승민 박사는 『미국이나 일본이나 각국의 기업지배구조 등 경영모델은 환경변화에 따라 계속진화하고 있다』며 『나름의 역사적 특수성을 갖고 변해온 외국 기업의 경영 틀을 한국기업에 그대로 이식할 순 없다』고 밝혔다.그렇다면 한국기업의 새로운 경영 모델은 어떻게 모색돼야 할까.전문가들은 기존 한국적 경영방식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개선하는식으로 새로운 틀을 찾아가는게 순리라고 조언한다.이런 측면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기업이 지향해야 할 경영모델로 「민주적 경영」을 서슴없이 제시한다. 그동안 한국기업 경영의가장 큰 문제점이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경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지나친 외부차입을 통한 무모한 문어발식 기업확장이나 과잉투자가 모두 그렇다. 오너 한 사람에게 경영 전권이 집중된 탓이라는얘기다.따라서 오너의 독단경영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기업경영을 민주화하는 게 한국기업의 핵심 과제라는 것. 더구나 과거 한국적 경영의 장점으로 여겨졌던 오너의 과감한 「베팅 경영」이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엔 맞지 않다는 게 중론인 만큼 합리적인 민주경영이야말로 한국기업의 지향점으로 주목받고 있다.오너의 독단경영을 견제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정치와 똑같다. 민주정치의 근간이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이듯 경영의 민주화도경영권 분산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경영권의 3권 분립이 바로 그것이다. 경영학에선 경영 3권 분립이라고 하면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를 세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한국기업에선 오너(대개 최고경영자 및 대표이사)를 중심으로 한 경영진의 파워가 워낙 세기 때문에 경영 3권을 △경영진 △이사회 △감사 등으로 분산시키는 게 더욱 설득력있다.여기선 경영진(최고경영자)이 행정부(대통령)라면 이사회(주총에서선임돼 주주이익 대변)는 국회(선거로 뽑혀 국민 대변)이다. 감사는 사법부로 보면 된다. 이렇게 경영권이 경영진 이사회 감사 등으로 분산돼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 이뤄질 때 합리적인의사결정과 효율적 경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이중에서도 특히 이사회의 독립성 확보가 열쇠중의 열쇠다.『지금처럼 기업의 이사회가 최고경영자에게 예속돼 거수기 역할이나 해선 안된다. 이사회의 이사는 기본적으로 주총에서 선임되는만큼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최고경영자의 사업방향이나 투자결정을 실질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없는 사업은 막아야 하고 무모한 투자결정에도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정광선 중앙대교수)이를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는 게 사외이사제다. 현재국내 30대 그룹 계열사들의 경우 지배주주(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계열사 포함)가 갖고 있는 지분이 상장사는 27%, 비상장사는 65%에달한다.때문에 이사회 멤버는 지배주주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만 채워지기 일쑤다. 나머지 기관투자가나 소액주주들의 대표는 이사회에 참여할 여지가 없다. 이들 외부 주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선 이사회에 사외이사들을 참여시키는게 최선책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대기업의 주주인 은행 등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다. 주주로서의 권익을 지키려는 자발적인 행동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는 바로 선진형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의 첫발이기도 하다.◆ 금융자율화 선행 필수기업 경영이 이처럼 모든 주주들의 이익이 대변되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뤄진다면 이외의 채권자 종업원 협력업체 고객 등 이해관계자들의 이익도 극대화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기업활동의 원천은 채권자든 주주이든 간에 자본을 끌어들여 생산과 판매활동을 하는 것인데 여기서 보상의 규모가 유일하게 결정돼 있지 않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노력이야말로 기업의 가치를 최대화시키는것(「기업의 생존부등식」 참조)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어쨌든 이사회가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여기에감사가 회계나 업무내용을 면밀히 감시한다면 경영의 민주화는 달성되는 셈이다. 이 경우 한국경제의 핫이슈였던 기업의 소유·경영분리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독립적인 이사회가 기업 경영을 적극 견제한다면 최고경영자는오너이든 전문경영인이든 관계없다. 민주적 경영시스템만 확립된다면 흰 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새로운 한국적 경영시스템의 모색은 소유 경영분리라는 지리한 쟁점에서 벗어나 이제 어떻게 하면 기업의 의사결정이 합리적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느냐는 차원에서 진행되야 한다』(이원흠LG경제연구원 이사)문제는 민주적 경영시스템을 한국기업들에 어떻게 접목시키느냐다.이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한다.『정부가 어떤 특정 모델을 설정해 놓고 기업들을 강제해선 안된다. 경영시스템의 전환도 철저히 시장원리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최고경영자가 전횡을 하는 기업과 이사회 등의 견제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해 전횡기업이 도태되면 자연스럽게 민주적 시스템이 확산돼 나갈 것이다. 시장에서의 승자는분명하기 때문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이원흠 LG경제연구원 이사)『경영시스템의 개선은 기업들 스스로 알아서 바꿔나가는 게 가장좋다. 정부는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만 마련해 주면 된다. 예컨대 사외이사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금은 불허되고 있는 기관투자가의 신탁계정에 대한 의결권을 인정해주는 것 등이 필요하다』(정광선 중앙대 교수)『기업 경영구조 개혁의 전제 조건은 은행등 금융기관의 경영 시스템이 먼저 개혁되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 등 기관투자가들이 기업경영에서 주주로서 적극적인 권리를 행사하려면 금융기관이 먼저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경영구조로 변해야 한다. 은행이 그렇게 바뀌면 기업도 자연스럽게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 개혁에 앞서금융개혁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