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2일 강남의 한 빌딩. S이주공사가 개최한 이민설명회에약 7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30~40대인 이들은 약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설명회 내내 강사로 나온 이민컨설턴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설명회가 끝난 다음에는 일문일답 시간이 이어졌다. 캐나다에 대한 문의가 줄을 이었고 강사는 갈증이나는지 연신 물을 들이켰다. 설명회장에서 만난 이진우씨(보험영업사원)는 지난 1월부터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데 마침 회사 근처에서열려 정보수집차 들렀다며 내년 초 출국을 목표로 이민에 필요한것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런 장면은 서울에서 일주일 내내 되풀이된다. 각 이주공사들이여는 설명회에는 자리를 거의 메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열띤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예전에는 40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요즘에는 30대들의 모습도 자주 띄고 20대들도 많이 늘었다. 더욱이 이민설명회는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한달에 고작 10여 차례열리던 것이 최근에는 30여차례 이상으로 늘었다.그러나 참석자수는 전혀 줄지 않았다. 업체에 따라 다르지만 오히려 20~30% 가량 늘어났다는 것이 이민업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심지어 50% 이상 늘어난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현대이주공사 김우경 이사는 정확하게 집계해보지는 않았지만 이민희망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 이민 처음으로 4천명선 넘을듯전체적으로 이민희망자가 얼마만큼 증가했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힘들다. 통계로 잡히지 않는 까닭이다. 더욱이 이민의 특성상 혼자서 은밀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만 이주업체 관계자들의 체감지수를 재보면 윤곽 정도는 파악해볼 수 있다. 온누리이주공사의 안영운 사장은 『이민설명회도 그렇지만 실제로 이주공사에 찾아와 상담을 하고 가는 사람들도 30% 이상 늘었다』며 『이주공사가 크게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이민희망자는 IMF사태 이전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난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최근 들어 이민희망자가 늘어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경제가발전하고 정치가 안정되면서 그동안 이민은 계속해서 줄어왔고 이런 현상은 최근까지 이어졌다.이를 수치상으로 살펴보면 80년대 이후 이민자수는 86년의 3만7천명을 정점으로 지난해까지 꾸준한 감소세를 보였다. 90년대 이후만봐도 90년 2만3천여명이었던 것이 96년에는 1만2천9백여명선까지줄었다. 97년에는 1만2천5백명으로 감소세가 둔화됐지만 어쨌든 전년에 비해 4백여명 감소했다. 올해는 아직 정식 통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이런 추세대로 갈 경우 올해 연말쯤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준비중인 이민희망자들이 본격적으로 출국하는 시점이 올해 연말에서 내년초가 될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다.특히 최근 새로운 이민지로 떠오르고 있는 캐나다 이민은 사상 처음으로 4천명선을 넘어설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이민희망자들이 늘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먼저 국내 경제의 침체를 들수 있다. 최근 몇년간 계속해서 적자를기록한데다 IMF사태로 경제사정이 크게 악화되면서 이민에 관심을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특히 국내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 새로운 돌파구로 이민을 모색하는 사례가 많다는후문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중소기업 경영자나 중역, 또는 대기업체 부장급 이상 인물들이 많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연매출 6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정리하고 오는 가을 이민을 떠나는 이종민씨(42)는 『지난 2년 동안 겨우 현상을 유지하다가 지난해 10월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며 『이민을 가서 새로운사업을 모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또 하나는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는 실업문제다. 고용이 흔들리면서 자신도 이젠 정리해고의 대상자가 될수 있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민설명회 때마다 보통10여명의 직장인들이 찾아온다는 얘기도 이제는 새로울 것이 없는상황이 됐다.LG화재에 근무하는 김모씨(45)는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꿈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느낌이 든다』며 『연봉이 적잖이 줄어드 는 등회사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민을 결심했다』고 말했다.다소 고전적이지만 교육문제도 들수 있다. 자녀교육을 위한 이민은기본이다. 아무리 다른 목적이 있더라도 교육여건이 마음에 들지않으면 꺼리는 게 우리 부모들의 기본 생리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돈이 많이 드는 유학 대신 편법으로 일단 이민을 갔다가 현지에서자리를 잡은 다음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관심을 끈다. 유학의새로운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이주공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삼성생명의 정모 대리(33)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정대리는 유학은가고 싶은데 돈이 넉넉지 않아 고민하다가 캐나다에 일단 이민을간 다음 현지에서 대학에 들어가면 된다는 말을 듣고 이민을 결심했다. 그는 오는 9월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내와 함께 이민길에오를 예정이다.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민희망자의 증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더욱이 이주공사가 난립하면서 갖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민 알선업체의 경우 지난 96년 초 4개에 불과하던 것이 불과2년여 사이 23개사가 늘어 27개나 된다. 자연 과당경쟁이 일어나고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하고 있다.지난 3월12일에도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을 모아 서류를 조작한 다음 이민을 보내는 등 불법으로 이민을 알선해온 르네상스 해외이주개발 상무 유모씨가 구속됐다. 이민은 가고 싶은데 자격은 안되는사람들과 돈에 눈이 어두운 업체 대표가 공모해 문제를 일으켰던것. 유씨등은 불법유학과 위장 취업이민 등을 알선해주고 69명으로부터 무려 30억원을 챙겼던 것으로 드러났다.정부에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주공사의 경우 엄격한 허가를 받아야 영업을 할수 있다.그런데 이들 업체 가운데는 불법을 일삼는 일종의 무자격 업체도있다는 것이 업계의 판단이다. 정부에서 허가권을 남발하다보니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않은 업체들이 허가권을 얻어 불법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알선해주고 있다는 것.◆ 조건 까다로워 ‘갈수있는 나라’ 드물다심지어 필리핀 주재 대사관을 통하면 빨리 갈수 있다고 유혹, 거액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지 않고 있다. 다만 구체적인 사례를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주공사라는 명칭문제도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뜻 들으면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내막을 모른채 믿고맡겼다가 상대의 농간에 낭패를 본 사례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그러나 이들 이주공사는 실제로는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는 민간기업이다. 이는 과거 정부 산하의 해외이주개발공사가 이민문제를전담하다가 민간으로 이양되면서 업체들이 그 명칭을 그대로 써온것인데 아직 시정되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허가를 받은 업체들까지 한결같이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이에 대해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이주공사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공문을 내려보냈지만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이민문제는 정부로서도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나가겠다는 사람들을 말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민을 권장할 수도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은 정부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는듯하다. 이제는 지구촌 시대인만큼 정부가 나서서 좀더 적극적으로이민자들을 위해 노력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이민자격 문제다. 정부가 외교력을 동원해 한국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나가는 나라를 상대로 자격조건이 이민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지금은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나갈 수 있는 나라가 거의없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