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빵만으로 살수 없다. 톨스토이가 같은 제목의 소설을 통해주장한 내용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제다. 그러나 경기도 고양시 행신지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웨스트 진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김서영사장(35)의 생각은 조금다르다. 빵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빵은 사랑과 정성을 함께 버무린 먹거리이지 각각 별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과점 주인들이 「우리 아이들이 먹는빵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김사장의말이다. 「사람에게 먹거리가 가장 중요하다」(以食爲天)는사기(史記)에 나오는 구절을 생각나게 만드는 말이다.김사장이 이런 말을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제과제빵에 인생을 걸결심으로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하며 제과제빵기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대형할인점이나일부업자들이 빵값을 인하하면서 가격경쟁을 주도하는 일이 잦아지는데에 따른 불만도 작용했다.『빵의 99%는 수입품입니다. 그런데 원자재 가격이 올랐음에도 빵가격이 오르지 않았다면 결국 재료를 갖고 장난친다는 말밖에 안됩니다. 포장비를 줄였다지만 포장비는 1원 안팎입니다. 결국 발효재료인 이스트를 과하게 넣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고밖에 볼수 없습니다. 이런 빵은 먹어서 결코 몸에 좋을 리가 없거든요.』 마치 자신에게도 그런 시류에 몸을 맡기기를 강요하는 듯한 현실에 화가난다는 투다.빵에 관해서만큼은 「장인」을 추구하는 듯한 김사장이 제과제빵에몸을 담은 것은 지난 95년. 대학원을 다니다 입대해 41개월의 학사장교생활을 마치고 들어간 항공해운회사를 그만두면서다.『직장생활에 「뻔한 끝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자신이 남 앞에 펼쳐 보여줄 메리트를 잃어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들 정도였으니까요.』그래도 직장을 그만두는데 망설임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복종할 줄 아는 사람만이 명령을 내릴 줄 안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택한 직장생활이었다. 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고 히든카드를갖춰야 한다」는 생각은 머뭇거림을 없애주었다. 대학시절 종교적인 일로 이탈리아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관심을 가진 후에끊임없이 자신을 유혹해온 「먹는 장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이상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여기에는 서울 강남에서 누구나 알만한 큰 제과점을 운영하던 외갓집의 영향과 은근히 기술을 배우길원하는 집안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비수기에도 매출 꾸준회사에 사표를 낸지 3일만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외국기술을 그대로 모방하는 한국의 제과제빵기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데다 늦게 시작한만큼 기존의 제과점들과 차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는게 미국행에 대한 김사장의 설명이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삼촌에게로 갔다. 40여년간 제과제빵에만 전념해온 삼촌은 하와이대에 강의를 나갈 정도로 유명한 제과제빵 기술자이자 지역에서꽤나 유명한 제과점을 운영하던 제과점 사장이었다.「사부」로부터(인터뷰 도중에도 김사장은 삼촌을 번번이 「사부」라고 불렀다) 1년간 스파르타식으로 빵기술과 경영전반에 관한 것을 배운 후에 다시 1년 과정으로 페이스추리전문학교에 입학했다.이 학교에서 김사장은 디저트용 과자와 케이크를 전공으로 택했다.『우리나라 대부분의 제과점을 보면 생크림·버터크림·무스케이크외에 다른 케이크가 없어 이들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김사장은 자신의 주특기를 케이크로 내세운다. 『30여가지의 케이크를 만들며, 손님의 주문에 따라 모양과 재료 내용물 등을 활용한다』는게 김사장의 말이다.학교를 졸업한 후 어느 정도 제과제빵에 자신이 생기면서 2년4개월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게 지난 8월. 바로 한국의제과제빵학원에 들어갔다. 자격증이 필요한데다 「한국빵을 알아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자격증취득 후 바로 제과점 개점작업에 들어가 지난해 11월에 웨스트 진 베이커리를 열었다. 개업에만2억5천만원 정도의 큰돈이 들었다. 『좋은 시설을 완벽하게 갖춰야좋은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다 보니 큰돈이 들었다』는게 김사장의 말이다.그러나 제과점이 위치한 아파트단지가 입주가 덜된데다 「맛으로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으로 일체의 홍보를 하지 않은 탓에 처음에는 고전했다. 흔히 말하는 「개업발」도 없었다. 하루 평균매출이10만원이 채 안돼 재료비를 대기에도 부족했다. 하지만 「맛」에모든 것을 건다는 생각은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평균10만원 꼴이던 매상이 매달 10만원씩 늘어났다. 멀리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오거나 행사에 쓸 케이크와 빵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자정을 넘겨 퇴근하는 생활도 어느 정도인이 박혔다.손님이 늘고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은 지난 2월 김사장은 다시 짐을 꾸려 현해탄을 건너갔다. 『한국빵의 기술이나 유행 등이일본에서 들어오는데다 일본은 제과제빵만을 수십년간 해온 장인들이 많아 반드시 일본을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2주 정도 일본에 머물면서 제과제빵업계에서 「장인」으로 이름난「6인방」의 빵집을 찾아 일본열도를 도는 한편 일본기술자들과 서로 갖고 있는 기술을 선보이며 교류도 했다. 일본에서 『맛과 품질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고 귀국한 김사장은 손님이 계속 늘어나면서 직원을 더 쓰는 한편 빵의 종류도 70여가지로 늘렸다.요즘은 여름철이라 제과점으로서는 빙수를 제외하면 비수기에 속한다. 하지만 김사장의 제과점은 매출이 꾸준한 편이다. 「맛을 보고찾는 손님」들이라는게 김사장의 생각이다.『빵 만드는 일을 쉽게 생각하는데 물이 뜨거운지 찬지는 손을 넣어봐야 압니다. 쉽게 생각했다가 망하기 쉬운 것이제과점입니다.』 최근 제과점 창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김사장이 들려주는 말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제빵기술을 배운 후 제과점을 냈다가는 결국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을가능성이 높다는 충고다.『사람들이 제과제빵에 많은 관심을 가진 요즘 관련 기술자들끼리서로 교류하면서 한국의 제과제빵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미국에 있는 유명한 제과점을 인수할 계획을 노릇노릇하게 익혀가고 있는 김사장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