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김치다. 「김치의 원조가 자기나라」라고 믿고 있는 일본인이 있을 정도로 김치보급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본고장 맛을 느낄 수 있는 김치를 찾기는쉽지 않다. 한국에서 수입된 것이건 일본상품이건 일본인의 입맛에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쿄시내 신주쿠에서 (주)영명의 김치는 다르다. 전통 발효식 한국식 김치로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게이오 이세탄 마쓰자카야 도큐 도부 소고 등 일본의 대형 6개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김치공장에다 김치박물관을 마련, 종주국인 한국김치홍보에 앞장서고 있다. 영명은 올해 4억5천만엔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일본에서 김치로성공한 대표적인 한국기업이다. 이 주인공이 바로 오영석사장(46)이다.오사장은 6월24일 자신이 한국식료품점 1호로 개점한 신주쿠의 「처가방」 2층에 한국의 전통가정요리점을 냈다. 1층에 들어있는 김치매장 김치공장 김치박물관에다 전통음식점까지 마련, 김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우리문화를 올바르게 보여주는게 바로 손님을 끄는 비결』이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부인이 직접 김치 담가 인기(주)영명은 한국의 전통발효음식인 김치를 단순히 파는데 그치지않는다. 한국의 김치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데 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처가방 1층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15㎡ 크기의 김치박물관이다. 배추 오이 무 등으로 담근 각종김치샘플과 보존용 장독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은 96년10월. 뜻밖으로 터져나온 반품사건이 계기가 됐다. 『한 고객이 「김치가 부패했다」며 반품을 요구해 왔다』는 백화점 식품담당부장의 연락이 온것은 저녁 8시반 무렵. 오사장은 즉각 백화점매장으로 달려갔다. 백화점측에서 문제의 깎두기 김치를 내놓았다.그 순간 오사장은 안심이 됐다. 오랫동안 절여둔 탓에 산미가 조금남아 있기는 하지만 맛은 괜찮았다.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치는 와인이나 치즈와 같은 발효식품으로 상한게 아니라숙성된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부장을 안심시켰다. 돌아오는 길에그는 숙성 정도를 김치에 표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더 급한 것은 김치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물관 마련은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매장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김치를 알리는데 큰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영명은 처가방 안쪽에 자리잡은 김치공장을 개방하고 있다. 오사장의 부인인 유향희(46)씨가 직접 김치를 담근다. 『이곳에서 직접김치담그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최선의 홍보전략』이라는게 유씨의설명이다. 유씨는 자신의 요리를 맛본 일본인들의 압력(?)으로93년4월 처가방을 냈다. 유씨의 김치담그는 솜씨는 수준급으로 평가됐다는 얘기다. 유씨는 화학조미료나 설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추 마늘 소금 젓갈 등은 모두 한국에서 갖고 온 것을 사용한다.『처음에는 일본의 굵은 소금을 사용했지요. 그런데 간수가 완전히빠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소금은 순한 맛을 냅니다.』 유씨는 한국재료를 쓰게 된 까닭을 이처럼 설명한다. 한국 맛을 제대로 내는게곧 품질을 인정받을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오사장은 한국 김치의 전도사역할도 해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민영TV의 김치프로그램에 5차례 나갔고 올해도 3차례나 나갔다.이같은 전통한국식 김치개발 홍보전략에 힘입어 영명의 매출은 급속도로 늘어왔다. 첫해인 93년에 4천만엔에 불과했던 매출이 94년1억엔, 95년 1억7천만엔, 96년 2억3천만엔, 지난해에는 3억엔으로불어났다. 김치매장 2층에 마련된 음식점의 오픈을 계기로 올해에는 4억5천만엔의 매출을 올린다는 목표다.오사장은 그러나 이 정도로는 결코 만족할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백화점 매장을 15군데로까지 확대하겠다는게 1차적인 목표다. 기존의 6군데 이외에 앞으로 9군데를 더 확보한다는 것이다. 음식점도더 늘릴 예정이다. 기존의 신주쿠점 이외에 3곳을 더 확보, 모두4곳으로 늘린다는 목표다.그는 또 하나의 꿈을 갖고 있다. 바로 대규모 한국물산전을 여는것이다. 한국물산전을 기획, 대형 백화점에서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나 기업들과 공동 개최하겠다는 계획이다.★ 인터뷰 / 오영석 사장오영석사장이 일본에 첫발을 디딘 것은 지난 83년. 고향인 대구에서 못다한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문화복장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패션유통을 공부한 다음 게이오 백화점에 취업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의 존재가치를살리는 것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다.「유통업의 세계화」를 주장하며 동료직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강좌를 시작했다. 24명으로 출발했던 「한국어교실」이 나중에는 2백명을 넘어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때마침 한국의 여행자유화로한국관광객이 일본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백화점을 찾는 한국손님들에게 한국어로 안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화점측에서 이를 받아들여 하루 세차례 한국어 장내방송을 실시했다. 한국어 팸플릿도 만들었다. 게이오 백화점이 한국손님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상품개발부로 옮겼다.이곳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지하식품부에 한국식품코너를 설치,김치를 비롯한 한국식품을 상설판매토록 했다. 한국물산전을 기획,성사시켰다. 민간외교관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 것이다.이처럼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백화점식품코너에 김치 등 한국식료품점인 「처가방」의 2호점을 내게 됐다. 93년10월이었다. 동료들의도움으로 일본백화점에 첫 진출하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오사장의부인인 유향희씨기 93년4월에 신주쿠에 차린 음식점(처가방 1호점)에 들렀던 동료들이 처가방의 실력을 인정, 적극 추천했던 것이다.이처럼 잘 나가던 그가 상사와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표를던진 것은 95년2월. 부인이 경영하는 김치공장이 탄탄하게 자리를잡으면서 독립해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본업인 패션컨설팅과 대규모 한국물산전 등이 바로 그것이다. 96년5월1일부터 7일까지 전북도와 공동으로 사이타마현에서 한국물산전을 개최,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김치담그는법 먹는법 등을 설명하기위해 TV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그는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직 시작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백화점에서 우리문화를 알리지 않았더라면 김치로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상품만 파는 시대가 아니라는게 그의 지론이다. 어떤 스토리를 만들고 문화를 전승시킨다는 생각없이는 일본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김치박물관도올바른 김치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