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사진분야 독자영역 구축...해외시장 눈돌려

사진예술은 19세기 초반 회화형식을 빌려 첫선을 보였다.문자와 화폭에 의존하던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일단의 화가들이 사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시작됐다. 당시 화가들은보이는 존재를 그대로 찍으려는 의도에서 사진에 관심을가졌다.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했던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화가들의 자리를 대신해 사진가들이 등장해 전문영역을 개척했고, 찍는 대상도 무궁무진해졌다. 심지어 사진을 통하면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도 있다.또 커뮤니케이션의 한가지 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도 예사롭지 않다. 사진은국제공용어다.홍보용 상품사진을 찍는 광고사진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명준씨(46)역시 왜사진을 국제적 언어라고 하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현재 사진스튜디오인 준초이(JoonChoi) 대표로 있는 최씨는 국내외를 넘나들며 국내사진작가의 실력을 유감없이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일년의 거의 절반을외국에서 보낼 정도로 「국제파 사진작가」로서의 입지를굳혀가고 있다.최씨는 경력 면에서도 국제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10년전 국내에 정착하기까지 줄곧해외 무대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실무를 익혔다. 미국 뉴욕에서는 세계적인 사진예술의거장을 직접 모시기도 했다.사진이 뭔지 몸소 체험하는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맨주먹 하나로 세계무대를 노크했던 최씨의 지난날은 결코순탄치만은 않았다.최씨가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지난 76년.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좀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현해탄을건넌 최씨는 니혼대 사진학과에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미 국내에서 사진을 전공했지만 기법이라든가 가르치는 방법이 달라 새로운 각도에서 사진을 다시 한번 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어 공부를 새로 한다는것이 여러가지로 힘들었지만배우는 즐거움에 어려운 줄을몰랐다.82년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최씨는 다음 행선지를 미국뉴욕으로 잡았다. 좀더 큰 무대에서 실무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특히 뉴욕은 세계 사진예술의 중심지답게 세계적인거장들이 기라성 같아 최첨단기법을 공부하는데 부족함이없을 것으로 판단됐다. 결국최씨는 졸업식을 마치자마자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국제파 사진작가로 명성 날려「한국 촌놈」의 눈에 비친뉴욕은 기회의 땅으로 손색이없었다. 한번 부딪쳐보자는의욕이 절로 생겨났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가 앞을 가로 막았다. 다름이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뉴욕에도착해 곧바로 패션 사진작가인 오먼드 기글리의 조수로일했는데 월급이라고 해봐야그야말로 쥐꼬리만큼밖에 되지 않았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될 정도였다. 다행히뉴욕 도착 첫해 미국 폴라로이드사의 사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힘을 얻었다.83년 최씨는 뉴욕생활에서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사진작가 제럴드 쟈네티를만났다. 그의 스튜디오에서스탭사진가로 일하면서 광고사진가로서의 기틀을 잡았고사진이 뭔지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특히 제럴드 쟈네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정신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힘입어 최씨는 84년 마침내 미국 광고사진가협회의 정회원으로 들어가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뉴욕에서 광고사진가로 이름을 쌓아가던 최씨는 88년 서울에 준초이 스튜디오를 오픈하면서 국내무대로 돌아왔다.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시장이 크게 활성화돼 자신의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가모셨던 제럴드 쟈네티 역시광고사진 시장으로서의 한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며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그러나 12년만에 다시 국내무대로 돌아온 최씨의 눈앞에펼쳐진 국내의 사진시장은 너무 척박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사진에 대한 인식도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았다. 기자재 역시 선진국의그것에 비해 너무 열악했다.최씨는 먼저 사진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부터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가격문제를 바로 잡고자 노력했다. 당시 광고사진의 경우 컷당 가격이 10만~15만원에 거래됐는데 최씨는 70만원을 불렀다.물론 사진의 질은 최신 기법을 총동원해 최대한 높였다.처음에는 너무 비싸다며 맡기기를 꺼리던 광고주들도 사진을 보고는 수긍했다. 돈이 아깝지 않다는 의미였다.최씨는 2년전부터 해외시장에눈을 돌렸다. 국내시장은 한계가 있는데다 시대의 흐름상해외시장을 개척하지 않고는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하나의 큰 모험이었지만 다행히 외국 광고주들의반응은 상당히 긍정적이어서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외국광고주들은 최씨의 사진에 대해서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긴다며 칭찬을 아끼지않는다.최씨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분야는 색다르다. 시계 보석 호텔 등 화려함을 자랑하는 상품이나 장소를 주로 찍는다.동업자들 사이에서는 워낙 섬세한데다 특유의 아름다움을충분히 표현해야 하는 까닭에찍기를 꺼리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씨는 영롱한 광채에 이끌려 지금까지 줄곧이들 상품을 찍어왔다. 작업과정 역시 아주 독특하다. 최씨는 항상 찍을 대상을 제압한 다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대상에 이끌려가서는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신념에서다. 예를 들어 호텔을 촬영할 때는 사전에 구석구석 훑어본 다음 고객들의출입을 통제해가며 찍는다.사전에 호텔 전체를 완벽하게파악한 다음 작업에 들어가는것이다. 호텔경영진과 고객통제 문제를 놓고 의견충돌이일기도 하지만 최씨는 자신의입장을 고집한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있는 사진을 찍기가어렵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최씨는 프로란 다른 사람에게정형화된 방법이나 패턴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일이 끝나면 항상 작업일지를쓰고 다음 날에는 좀더 색다른 이미지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이런 믿음 때문이다. 특히 그는 작업장에 들어서면 셔터는 조수에게 맡기고자신은 여기저기 둘러보며 뭔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최씨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외국의 광고주들이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것도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반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누구보다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그는 경험상 서양적인 것을어쭙잖게 표현하기보다는 우리의 전통미를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 외국인들의 관심을끄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굳게 믿고 있다. 후배들에게늘 「우리 것」을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