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세냐, 5대그룹이 세냐.은행과 5대그룹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금융감독위원회가 5대그룹의 사업구조조정(빅딜)을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며 은행을 통해「수술」할 방침을 밝혔다.금감위 이헌재 위원장은 지난 7일 기자간담회를 자청, 『은행과 기업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과잉투자 등으로 살아남기 어려운곳에 대해선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선전포고」를 결행했다. 전경련이 사업구조조정방안을 발표한 직후였다.이위원장은 『지난해 기아자동차처럼 여신이 많고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는 이유로 처리를 지연시킨 전례를 되풀이할 수 없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돼 있다』며 「청산」카드까지 내밀었다. 이는 5대그룹은 죽지 않는다는 「5대그룹 불사(不死)론」을 일축한것이다.금감위는 재계가 내린 산업정책적 가치판단만 수용할 방침이다. 재계가 제시한 사업구조조정업종을 「수술」대상으로 삼되 그 방법등은 전적으로 채권 금융기관이 알아서 판단토록 한다는 것이다.이에따라 석유화학 항공기 철도차량 선박용엔진 발전설비 반도체정유 등 7개업종이 우선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금감위의 작전계획은 단순하다. 우선 은행을 앞장세운다는 전략이다. 금감위는 싸움터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후방에서 작전을 지도한다는 것이다. 은행만 닦달하고 채찍질하면 5대그룹도 결국 따를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있다. 5대그룹에 대한 「보급로」를 지속적으로 차단한다는 계획도 실행에 옮기고 있다. 금감위는 그동안 5대그룹에 돈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총력을 쏟았다. 회사채 기업어음 상호지급보증 등에는 이미 손을 써놓았다. 돈줄이 마르면 5대그룹이 스스로 부실계열사를 퇴출시키는 등 구조조정노력을 더할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금감위는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과도 공조체제를 구축해놓고 있다. 내부거래나현금대여를 통해 부실계열사로 돈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있다.금감위는 이와함께 은행의 힘을 키워주는 조치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가장 먼저 제시된 방안이 공동작전을 구사토록 하는 것이다. 각그룹별로 주요채권단협의회가 구성됐다. 금감위는 5대그룹 주채권은행이 모두 참여하는 5대그룹사업구조조정추진위원회도 구성토록했다. 혼자 힘으로 부족하다면 「연합군」을 편성, 대응한다는 전략인 셈이다. 금감위는 이것만으로도 부족해 「외인부대」인 외부자문그룹(AG)까지 지원키로 했다.5대그룹사업구조조정은 특히 주채권은행과 5대그룹에 대한 실사를담당했던 주채권은행의 자문회계법인으로 구성될 5대그룹 사업구조조정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될 듯하다. 여기에는 은행및 회계법인관계자, 은행이 지명하는 기업구조조정전문가로 구성된 업종별「실무추진위원회」도 설치된다. 5대그룹은 참여하지 않는다. 채권금융기관이 주축을 이룬다는 얘기다. 추진위원회의 평가결과는「잠정의견」형식으로 5대그룹과 주요채권단협의회에 전달된다. 5대그룹과 채권금융기관이 이 잠정의견을 바탕으로 구조조정안에 최종 합의하면 재무구조개선약정에 반영한뒤 시행하면 된다.◆ 고래싸움에 은행만 터질까 우려그러나 합의에 실패할 경우엔 채권금융기관주도로 한계계열사 및사업부문의 매각 또는 정리, 보증채무이행청구 등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과 채권보전절차가 병행돼 추진된다. 한마디로 추진위원회의 안을 5대그룹측이 수용하지 않으면 「청산」절차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문제는 5대그룹측이 이같은 금감위 구도에 강력히 반발할 때 반강제적·강제적 구조조정, 현상유지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과거 산업합리화조치처럼 무리수를 둘수도 없는 상황이다. 금감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밀어붙일 태세다. 금융계에선 고래싸움에 새우격인은행만 얻어터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