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중 하나는 과잉 설비에 관한 것이다. 과도한 설비 투자야말로 한국 기업 뿐만 아니라 아시아 기업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골칫거리이다. 철강과 화학, 정유 등과같은 장치산업의 경우 과잉 설비 문제가 더욱 심각하며 문제를 시정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렵다. 게다가 한 기업의 잘못된 투자가 전체 산업에 심각한 파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설비 투자는더욱 신경을 써야할 문제이다. 수년간 산업 전문가나 학자들이 설비 과잉 문제에 대해 연구한 결과, 과도한 설비 투자는 그 산업에속한 모든 기업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설비라는 것은 일단 투자를 시작하면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큰 문제이다. 다시말해 장치산업의 경우 설비에 들어간고정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이 설비를 계속 활용하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공장은 계속 돌아가면서물건을 생산해 내지만 그 물건을 다 소화해낼만한 시장 수요가 없을 경우 재고가 쌓이게 된다. 경제 법칙에 따라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 가격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재고가 늘어나게 되면 기업들은시장 가격을 다 못받더라도 재고를 처분하려 하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급기야 가격 인하 전쟁이 시작된다.가격 인하로 인해 이익이 줄어들어 기업들은 원재료를 사서 공장을돌리는데 필요한 자금이 부족하게 된다. 자연히 생산을 줄이면서공장 가동률이 낮아진다. 가동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이미 투자한고정비를 회수하기 위해 생산해야할 제품의 수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결국 가동률 하락은 제품 단위당 코스트(비용)를 높이게 된다.동시에 제품 단위당 매출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된다. 결국 한 산업의 모든 기업이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돼 산업전체가 흔들리게 된다.이런 시나리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충분히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산업협회들이 자발적으로 적절한 설비 투자 기준과 투자 상한선 또는 하한선 등을 결정,각 기업에 이를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안고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아직도 스스로를 소규모의 가족 중심 경영체제를 가진 기업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설비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투자만계속하는 기업이 많다. 설비 투자는 5∼10년 후를 미리 예측하고또 산업이나 경제 사이클도 충분히 고려한 뒤 결정해야할 문제이다. 공장을 하나 짓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본 투자 지출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한국 기업에 부족한 경영 기술중의 한 가지가 바로 이 자본 투자관련 능력이다. 언젠가 한 재벌 기업의 고위 임원과 얘기를 나눌기회가 있었는데 수백만달러 규모의 자본 투자에 대한 의사 결정이공식적인 절차나 제대로된 분석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무척 놀랐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단행할 때 소위 말하는「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더욱 놀라운 사실은 학계나 정계에서조차 이런 사실을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든지 아니면 알면서도 묵과해 왔다는 것이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과잉 설비 문제는 이미 4∼5년 전에 예측돼 과도한투자를 막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어야 하는 것들이다.하지만 누구도 기업들의 설비 투자에 제동을 걸지 않았고 현재에이르러 새삼 과잉 설비 투자가 큰 걸림돌로 작용, 기업들의 도산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야기시킨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에 있다. 하지만 정부와 학계 그리고 기업의 주인인주주들도 이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sunny_yi@atkearney. 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