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를 촉발한 주범중의 하나로 흔히 한보그룹이 지목된다.한보그룹이 망하게된 결정적인 원인은 철강사업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80년대말 부동산 경기를 타고 주택건설사업에서 떼돈을 벌었던 정태수 전회장은 90년대들어 철강사업 진출을 통해 사세를 급속히 신장시켜 나갔다. 지나고나서 무분별한 차입경영이라는 지탄을 받긴 했지만 당시 한보의 위세는 대단했다.그런데 정태수 전회장이 한보철강을 설립하게 된 배경에는 한가지 일화가 전해온다. 한보그룹이 한보건설과 (주)한보를 앞세워30대그룹에 처음 편입됐을 당시, 정전회장은 재계총수 모임에서「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모은행의 창립리셉션에 초대를 받았는데, 어느 재벌총수도 자신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정전회장을 「어쩌다 돈벼락을 맞은 사람」으로 보았을 뿐재계내의 「사교 대상」으로 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물론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또 정전회장의 자격지심이 빚어낸 해프닝일 수도 있다.어쨌든 수모를 당했다고 느낀 정전회장은 그즈음부터 반듯한 제조업체를 갖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 결과로 한보철강이 세워졌고, 산업은행은 1조원에 가까운 돈을 퍼주었다는 얘기다.IMF사태를 전후로 워낙 많은 그룹들이 쓰러져 재벌그룹의위상(?)이 예전같지는 않다. 그러나 IMF사태가 닥치기전까지만하더라도 30대그룹은 한국기업의 상징이었고, 그룹 총수는 많은경제인들이 도달하고픈 사표였다. 대외적으로는 고도성장의 주역으로 「세계화」의 기치를 걸고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30대그룹은 누가 뭐래도 하나의 공고한 결사체였다. 몇년전까지존재했던 「30대그룹 기조실장회의」는 재계의 모든 현안을 일사불란하게 조율하며 막강한 경제권력을 휘둘렀었다. 기업의 절대적인 가치는 자산증대였다. 자산은 동시에 부채이기도 했지만,그 기업의 크기와 영향력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자산총액을 기준으로 30대 대규모기업 집단을 선정한 것도 오래전부터다.그러나 이처럼 오랜 패러다임은 IMF사태로 일거에 무너져버렸다.자산이 많다는 것은 빚이 많은 것으로 간단히 등식화돼버렸다.대신에 부채비율의 고저와 탄탄한 계열사의 유무가 재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IMF사태에 재벌 영향력 ‘와르르’어디를 둘러봐도 「신화」를 재연해볼만한 구석은 없는 것 같다.빚을 얻어 다른 빚을 갚거나 계열사를 세우는 방안은 금융구조조정을 거친 은행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IMFIBRD등의 직·간접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정부내 경제정책의 자율성도 현저히 저하된 상태다. 종전처럼 정부의 묵인 내지는 지시아래 금융권의 협조융자를 받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IMF사태는 재벌그룹의 위상 뿐만 아니라 재계내 순위에도 영향을미치고 있다. 매년 소폭으로 순위가 바뀌던 재계 랭킹은 극심한부침을 겪고 있다. 아예 30대그룹에서 탈락했거나 향후 탈락이확실시되는 그룹들이 부지기수다. 단적으로 현재 30개의 그룹중절반인 15개가 구조조정에 몸살을 앓고 있다. 워크아웃(기업구조조정)이나 화의,핵심계열사 정리등이 진행되면서 그룹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들이 많다.올해 신규로 30대그룹에 지정된지 불과 4개월만에 탈락한 곳도나왔다. 공정위는 지난 8월26일자로 거평(28위)과뉴코아(27위)를 30대그룹에서 제외했다. 회사정리절차 개시를신청한 계열사의 자산들이 그룹 전체계열사의 자산 50%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또 쌍용(7위) 동아(10위) 고합(17위)아남(21위) 신호(25위) 강원산업(29위) 등 7개 그룹은 워크아웃 과정에 있다. 화의가 진행중인 해태(24위)와 진로(22위)도 사실상 단일기업으로 회생을 꿈꾸고 있다. 한라그룹 역시주력계열사들이 화의 또는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가면서 재계랭킹12위의 지위를 무색케하고 있다.30대그룹에서 남는 곳도 예전같은 「공룡」의 이미지를 갖기는어렵다. 구조조정으로 대부분의 그룹들이 핵심사업부문 중심으로재편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룹의 자산총액도 크게 줄어든다.쌍용그룹은 최근 쌍용정유의 지분과 쌍용양회의 동해공장을 매각하고 쌍용건설과 남광토건은 워크아웃을 신청키로 했다. 쌍용정공 등 12개사는 통폐합되거나 매각대상에 올랐다. 이에따라 현재15조6천억원에 달하는 자산규모는 10조원 이하로 주저앉을 것으로 예상된다.랭킹 9위 금호도 최근 금호타이어와 금호건설을 합병하는 등 계열사들을 대거 정리하는 중이다. 효성(16위) 역시 효성T&C효성물산 효성생활산업 효성중공업 등 주력 4개사를 (주)효성으로 단일화했다. 한화에너지 한화기계베어링부문 등을 잇따라정리한 한화그룹(8위)은 당분간 랭킹 10위권에 재진입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라이신 사업 등을 매각한 대상그룹(26위)이나제지공장 등을 매각한 한솔그룹(15위)등도 사세가 크게 축소됐다.결국 이들은 예전처럼 「그룹」의 형태로 존재하기보다는 몇몇개별기업으로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결국 기업구조조정이 일단락되는 내년에는 올해 30대 그룹중 최소 10개이상은 30대그룹의 「훈장」을 반려해야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구조조정의 여파로 자산이 급격히 감소된 이들 그룹을 전통적인 「재벌」의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몰락」했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자산이라는 가치가 빛을 잃어버린 이상 기업을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지난달말 구조조정 기업 성공사례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한화 두산 한솔 삼양 대상 동양화학 제일제당 태평양 동아제약 동성화학 로케트전기 유한양행 하림등은 IMF 이전보다 오히려 기업이미지가 좋아졌다. 『돈은 못벌면서 양만 늘려 몇대재벌이라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5대, 10대그룹이 중요한게아니다』라는 이날 김대통령의 멘트는 재계의 변화되는 패러다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이렇게 보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재벌」의 명맥을 이어갈 곳은5대그룹과 롯데 동부 동양 코오롱등 일부 그룹으로 압축된다. 현대그룹(1위)은 최근 기아자동차와 한화에너지등 덩치 큰 기업들을 인수함에 따라 자산규모가 불어나 2위 삼성과의 격차를 더욱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 랭킹 4위로 처졌던 대우는 지난해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면서 3위로 복귀했다. 향후 5대 그룹내판도변화는 현재 정부와 재계사이에 논의가 오가고 있는 빅딜 여부가 관건이다.◆ 빅딜 ‘정치적’ 성격 강해 판도변화 없을듯그러나 5대그룹이 7대 업종을 맞교환하고 계열사를 30% 안팎으로 줄인다해도 5대그룹내 전체적인 판도는 별로 달라질게 없다는지적이다. 빅딜자체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있기 때문에 일부 그룹에 지나치게 기우는 교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5대그룹의 계열사 숫자는 IMF 이전이나 이후나 별로달라지지 않았다. 중견그룹들의 계열사를 인수하면서 일부 그룹은 계열사가 늘어나기도 했다.하지만 5대 그룹이라고 해서 종전처럼 마음껏 「선단식 경영」을구가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계열사를 대상으로 한 지급보증규제뿐만 아니라 내년말까지 부채비율을 2백%로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자산 처분이 불가피하다. 최근 5대그룹내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분사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고 있다.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정부내 일부 극단론자들은 마침내 「재벌해체」의 대망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될 것으로 믿는 눈치다. 구 경제기획원의 적통(?)임을 자처하는 일부 관료들은 재벌들이 개발경제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적으로 과도한 권력을 누려온데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기대는 『기업구조조정이 끝나면 재벌그룹은 독립기업들간에 기능적으로만 결합하는 네트워크형 기업으로 변신할 것』(재정경제부 관계자)이라는 아주 기술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새정부들어 5대그룹의 「저격수」로 변신한 공정위는 부당내부거래를 이유로 9백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 5대그룹을 주눅들게하고 있다.한편 이같은 사정을 감안해 차제에 정부의 대기업정책도 대폭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요즘같은 상황에서 군소 기업집단까지 행정규제를 할 필요는없으며 30대가 아닌 10대그룹 정도만 지정해 관리하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도입된 30대그룹 지정제도가 점차 실효성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경쟁력 집중 억제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실현되고 있다.하지만 정작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규제를풀고 권한을 내놓는 것을 왠지 불안하고도 허전하게 여기는 공무원의 습성 탓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아직은 30대그룹 정도는계속 관리해야 한다는 게 정부방침』이라고 간단하게 일축했다.결합재무제표 작성등 30대그룹을 기준으로 마련된 제도가 많다는것도 이유로 덧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