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빛의 놀이이다. 초보다 작은 단위로 쪼개진 빛은 어둠과격렬하게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하면서 필름에 이미지를 새긴다.인화지의 맨살로 드러나는 눈부신 햇살부터 먹물 같은 그림자까지, 빛은 흑과 백을 양극에 두고 무수히 나누어진다. 금호갤러리에서 만나는 주명덕의 흑백사진은 그러나 참으로 빛에인색하다. 그의 사진은 빛이 아니라 어둠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 모든 사물은 어둠 속에서 최소한의 빛으로 그 형태를 드러낸다.「사진에」(An die Photographie)라는 큰 제목 아래 걸려있는 작품은 모두 풍경이다. 설악산 자락과 들꽃 핀 들판이, 대나무숲과 배추밭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아름답거나, 혹은 위대해야 할자연의 모습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바싹 코를 박고 들여다보면그제서야 어렴풋하게 가늠이 갈 정도로 어둡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해부하듯 들여다보는 풍경은 사실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늘 멀찍이서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다보던 풍경이 관람객에게 가까이 오라 명령할 때, 그래서 다가설 때 풍경의 관습은 깨진다.하지만 여전히 관람객은 그것이 풍경이 아님을 눈치채지 못한다.시커먼 사진 속엔 정말 풍경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산과 나무, 또 꽃과 풀이 분명히 있다. 게다가 그것들은 빈틈하나 없이 인화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래서 풍경이구나 하고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이쯤에서 관람객은 작가가 묻는 실경(實景)과 진경(眞景)의 의미에 마주한다. 제목과 이미지가 제대로 일치하는지에 대한 확인은중요하지 않다. 보이는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경에 비해 진경은주관의 공간과 자기 투시의 여지가 열려 있다. 「우리의」 풍경이 아니라 「나만의」 풍경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풍경은어떤 것인지 그 어둠 가득한 사진속을 들여다보자.<지리산 designtimesp=18143>의 풍경은 뒤엉킨 실타래 모양이다. <여주 designtimesp=18144>에서 찍은 풀줄기도 마찬가지다. 분명 낯선 모습은 아닌데, 그렇다고 익숙하지는 않다. 대숲을 담은 <제주도 designtimesp=18145>는 흡사 네거티브 필름 같다.검은 종이 위에 흰 물감으로 그린 듯, 이 사진에서는 까만 바탕이 여백이 된다. 다른 눈으로 본 자연의 모습들이다.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무거운 진흙을 밀어내 길을 만드는 <경주 designtimesp=18146>와 서리 내린 배추밭 <일산 designtimesp=18147>은 자연을 향해 한층 낮아진 시선이다. 자연이란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생명의 힘 자체로 숭고하지 않은가, 하는 겸손한 깨달음이 묻어난다. <해인사 designtimesp=18148>는 흙탕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이 흑백의 이미지로 바뀌면서 적요한 아름다움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이 만남은 더러운 물웅덩이와 산사의 만남이라는 또 한번의 대비로 역설의 미를 배가시킨다.작가는 아마도 마음 속 자연의 모습을 현상해내기 위해 거꾸로돌아가는 길을 택한 듯 하다. 사물을 빛이 아니라 어둠의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것, 화면을 가득 채움으로써 여백을 남기는 것,또 하찮은 모습에서 자연의 힘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대상은 초라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불균형 투성이다.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풍경들은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한바퀴 돌아나온 풍경은 이미 다른 의미의 풍경으로 변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덮고 있는 짙고난해한 어둠은 마음 속 풍경을 더욱 빛나게 하는 부드러운 어둠으로 자리바꿈한다. 3월4일까지. 02)72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