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을 제패하고, 이봉주선수가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손기정옹 이후 꽤 오랫동안 우리는 마라톤 후진국이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라톤 경기가 농구처럼 서양인들에게 특별히 유리한 종목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렇게 헤매고 있는걸까. 날리던 옛시절을 보면 체질 탓은 아닌데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기록은 7분벽을 넘는데 10분 벽도 못 넘고 왜 이 안달을 하고 있는걸까.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타나 한국신기록 수립에 얼마, 10분벽 돌파에 얼마 하는 식으로 현상금 비슷한 것을 걸고, 언론에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많은 스타들이 탄생했다. 지금은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이냐 은메달이냐를 논할 정도로 마라톤 선진국이 되었다.애들 운동회에 갔다온 집사람이 초등학교 애들이 어쩌면 그렇게 춤을 잘 추는지 모르겠다며 감탄을 한다. 하기야 내가 아는 젊은 여자들중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춤뿐이 아니라 노래 또한 능하고 전국민이 이를 즐긴다. 예로부터 가무에 능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가 이렇게 가무에 능하게 된데는 유전적인 요소외에 언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주말마다 황금시간이면 모든 방송국이 전국민을 상대로 춤과 노래교육을 한지 벌써 몇해인가. 그렇게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도 가무에 능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사람을 우상화시켜 기립박수치고, 꽃 갖다 바치고, 울며 부르짖는 북한 주민을 보면 이상하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곳에 방향을 고정시키고 전자원을 쏟아부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세뇌가 되는 것이다.고등학교 시절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숫자가 그 학교의 우수함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새로 부임한 교장께서 3백고지(서울대에 3백명 들어가기)니, 1천일 작전(고1의 경우 입시일까지 남은 일수)이니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학생과 선생을 세뇌했고, 서울대에 입학한 선배들을 수시로 불러다 그들의 성공이야기를 듣게 했다. 자연히 다른 곳에는 아무런 가치를 둘 수 없었다. 세뇌의 잘잘못을 떠나 세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그렇게 높은 문맹률을 자랑(?)하는 미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분야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사람들을 그쪽으로 유인하기에 가능했다. 거꾸로 문맹률 제로에 육박하는 이 우수한 인력을 실업대란으로 몰고가는 것은 여러 분야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는데서 비롯됐다.황금시간대에 전국민을 상대로 춤과 노래 교육을 할 것인지 아니면 <성공시대 designtimesp=18217>를 방영할 것인지, 매일 부정부패와 비리로 가득찬 뉴스로 온 국민의 힘을 뺄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점을 짚으며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희망을 줄 것인지, 우수한 인력을 고시촌으로 내몰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실리콘밸리에 꼬이게 할 것인지.사람들은 이끄는대로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