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조직 고수, 주주 경시 등 부작용 ... 자동차 등 매출 급감 '위기'

미쓰비시는 일본식 경영을 대표하는 재벌그룹이다. 「국가와 함께 나간다.」 이는 미쓰비시의 1백30년 역사를 집약하는 말이다. 평범한 무사 출신의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는 번으로부터 받은 배3척으로 1870년 미쓰비시의 전신인 99상회를 설립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사수송 등 정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정부로부터 다카시마탄광 나가사키조선소등을 불하받았다. 4대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는 「쇼키호코(所期奉公)」를 사훈으로 내걸었다. 국가를 위한 봉사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국가와 더불어 성장하는 「국가회사주의」를 통해 미쓰이에 이어 일본 제2의 재벌로 부상했다. 2차대전후에도 이는 여전히 미쓰비시의 금과옥조였다. 재벌해체로 이와사키집안의 경영도 끝났다.그러나 산하기업들은 기업집단으로 다시 뭉쳤다. 이들은 창업정신인 「쇼키호코」를 내걸었다. 중공업 전기가 방위산업에서 정상에 올랐다. 정부주도산업인 중화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석유위기 이후에는 정부를 등에 업고 해외로 진출했다. 정부지원으로 해외진출에도 성공했다.80년대 미일간 최대 현안이었던 무역마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기업의 「게이레쓰(系列)」를 문제삼고 나왔다. 일본의 기업들은 계열사간 거래를 우선했다. 미국 은행들의 융자도 일본의 계열은행 벽에 부딪쳤다. 계열기업들은 주식보유와 임원파견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미쓰비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전기는 일본의 방위산업의 정상에 올라 있었다. 미쓰비시은행 신탁은행 메이지생명 도쿄해상화재로 짜여진 금융그룹은 최강이었다. 미쓰비시은행은 88년에 뱅크 오브 캘리포니아를 2억8천만달러에 사들였다. 미쓰비시지쇼(地所)는 89년에 뉴욕 록펠러센터의 지분 51%를 8억5천만달러에 매입했다. 미쓰비시상사 또한 전세계에서 거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미쓰비시는 미국을 위협하는 「일본주식회사(Japan Inc.)」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이다.◆ 라이벌보다 개혁 강도 약해미쓰비시는 가장 안정적인 그룹으로 꼽혀왔다. 28개 주력기업 사장들이 참가하는 「금요회」가 그룹의 전략을 짜왔다. 경영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성장을 해왔다. 그래서 「조직의 미쓰비시」 「신사의 미쓰비시」 등으로 불려왔다.이같은 미쓰비시가 90년대 들어서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지쇼가 인수한 록펠러센터가 95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96년에는 미쓰비시자동차가 미국에서 성희롱 소송에 휘말려들었다. 미쓰비시은행과 도쿄은행간 세계 최대의 합병의 성과도 신통치 않았다.실적도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금요회멤버 28개사에서 금융기관과 비상장기업을 제외한 22개 기업의 매출은 91년3월기에 32조2천억엔에 이르렀다. 과거 최고기록을 낸 계열사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후부터 실적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98년3월기에는 27조6천억엔으로 줄어들었다. 경상이익도 줄어들기는 마찬가지다. 22개사 경상이익은 91년3월기 8천7백74억엔을 정점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다. 98년3월기에는 3천3백70억엔에 머물렀다.주력 계열사들도 하나같이 부진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얼굴격인 중공업의 경우 사상 최고인 1천9백27억엔의 경상이익을 올린 96년을 정점으로 급속 악화되고 있다. 98년도에는 매출이 전년에 비해 5.8%, 경상이익이 64% 각각 감소했다. 98년도 하반기에는 처음으로 경상적자를 내고 말았다. 부채도 1조엔 규모에 이르고 있다. 불황으로 인한 국내 설비투자 부진에다 주요 수출지역인 아시아의 경제위기, 엔고까지 겹치면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마스다사장은 『수주하면 이익을 남기는 시대는 갔다』며 앞으로는 선별수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라이벌에 비해 개혁의 강도가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는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자동차는 98년3월기에 매출 2조5천억엔에 2백21억엔의 경상적자를 냈다. 88년12월 주식상장이후 처음으로 무배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동차는 고급승용차 「디아만테」와 레저용 4륜구동차 「파제로」가 히트를 쳤다. 그러나 미국 일리노이공장의 성희롱 소송, 총회꾼에 대한 불법이익 제공 등에 휘말려들면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경기불황까지 몰아닥쳤다. 3년 동안 3명의 사장이 옷을 벗었다. 97년11월 가와소에 가쓰히코상무가 13명의선배를 제치고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2001년3월까지 3천5백억엔의 코스트를 삭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현재 체력으로 회생이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국내외 업체와의 제휴설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명문으로 꼽혀온 전기도 위기를 맞고 있다. 98년3월기에 연결기준으로 1천59억엔 적자를 냈다. 69년도에 연결결산을 도입한 이래 첫 적자다. 이에따른 책임을 지고 기타오카사장이 물러났다. 99년3월기에도 2기연속 적자를 낼게 확실시되고 있다. 반도체 AV 컴퓨터부문의 채산악화가 결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불황장기화로 반도체부진을 메꿔오던 중전기 통신시스템 FA부문이 악화,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석유는 아예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미쓰비시석유는 97년3월기부터 적자에 허덕여왔다. 점유율 확대 과정에서 일어난 「이즈이석유상회사건」이 결정타였다. 경영진이 물러났다. 결국 일본석유 산하로 들어갔다. 3다이아몬드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만 것이다.기린맥주의 부진은 충격적이다. 기린의 점유율은 76년에 63.8%에 이르렀다. 86년에 60%가 무너진 이래 계속 하락, 지난해(발포주 제외)에는 아사히맥주에 정상을 내주고 말았다. 44년만에 2위로 전락하고 만것이다. 「라거」라는 간판상품으로 왕좌에 군림하면서 고질화된 대기업병이 결국 화근이 되고만 것이다.◆ 경영시스템 문제로 ‘비틀비틀’미쓰비시가 왜 이렇게 비틀거리고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바로 경영시스템의 문제다. 계열사들은 「미쓰비시 무라(村)」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주식상호 보유와 임원상호 파견을 꼽을 수 있다. 주식상호보유비율이 98년3월기에 28.5%에 이르렀다. 그룹내 25개사에 파견된 임원의 비율이 12.9%에 이르고 있다. 조직의 미쓰비시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적 특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로인한 부작용은 엄청나다. 주주를 경시하는 경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경영체크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99년3월15일자에 미쓰비시의 3다이아몬드 로고와 함께 「어떤 계열의 붕괴」란 제목으로 표지를 채웠다. 비즈니스위크는 『10년전에는 미쓰비시그룹의 파워가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급속히 침몰하고 있다. 거대한 전함 다이와(大和)가 격침된 상황을 연상시킨다』고 보도했다.미쓰비시그룹의 구심력은 최근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도쿄미쓰비시은행의 제3자증자에 중공업이 「노」를 했다. 얼굴기업인 중공업의 아이카와 회장은 금요회의 대표이다. 그런 아이카와회장이 계열사의 증자 참여를 거부했다. 종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뿐만 아니다. 치요다화공의 구제와 자동차의 지원에 대해서도 아이카와회장이 「노」를 했다. 「신사의 풍토」에 제도피로(制度疲勞)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미쓰비시 계열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해야 할 것은 명백하다. 바로 그룹의 울타리에서 맴도는 일본식 경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