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믹스 2기 경제팀의 사령탑에 오른 강봉균 신임 재정경제부장관. 그는 어찌보면 무척 고독한 사람이다. 같은 관료들 말고는 친구가 별로 없다. 일에 미쳐 지내느라 「교제하고 다닐」 시간도 없었을 것이라는게 후배 관리들의 설명이다.이런 강장관의 프로필에는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들이 있다. 「기획통」이라든지 「직설적」이라는 등의 평이 그것이다.우선 기획통으로서의 면모. 강장관은 여느 장관에 비해 이력서가 극히 단순하다. 행시에 합격(6회·69년)한 이후 노동부 차관(93년)으로 승진할 때까지 경제기획원,그중에도 소위 기획라인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특히 기획국장을 4년간이나 맡아 고(故)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에 버금가는 장수기록을 세웠다. 또 이례적으로 기획국장에서 막바로 기획원 차관보로 승진,3년간 기획라인을 이끌었다. 그가 작업에 참여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도 3차부터 7차까지 5차례나 된다.강 장관이 이처럼 기획라인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정평이 나있는 순발력과 추진력 덕분이다. 이를 보여주는 예화가 90년 4·4경제활성화 조치다. 당시 한국 경제는 3저 호황이 끝난데다 금융실명제 파문으로 「총체적 위기설」에 직면했다. 결국 그해 3월 조순 부총리가 물러나고 이승윤 부총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부총리는 부임과 함께 경기부양대책을 마련토록 지시했고 강봉균 기획국장은 불과 10여일만에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강국장은 뒤이어 실명제 유보에 따른 보완책인 「4·13부동산 투기대책」 「5·8부동산 대책」 등을 기획해냈다.진념 기획예산처 장관이 기획원 시절 강장관을 줄곧 밑에 두고 놓아주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능력을 대변해준다. 강장관은 진장관이 종합기획과장 시절에는 그 밑에서 총괄계장으로,진장관이 차관보 때는 기획국장으로 근무했다. 때문에 이번 개각에서 강장관이 수석부처 장관이 됐더라도 이같은 관계에는 변함이 없어 향후 정책조정이 유연할 것으로 주위에서는 관측하고 있다.다음으로 강장관의 성격상 특징은 직설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도 두가지 예화가 있다. 하나는 차관보 시절 어느 시사토론회에서의 일. 패널리스트중 한명인 K대 이모 교수가 계속 부실한 자료를 근거로 정부를 공박하자 결국 강 차관보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교수님,앞으로는 이런 자리에 나오실 땐 공부좀 하고 오세요』강장관의 직설은 때론 지나쳐 독설이 되기도 한다. 역시 기획원 차관보 시절 1급 회의를 주재했을 때의 「사건」이다. 당시 건설부 차관보가 주택건설 확대를 주장하자 강 차관보가 한마디 내뱉었다. 『건설부는 업자들 대변인이요?』 이 말에 건설부 차관보가 분을 참지못해 육박전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하지만 이런 직설적 성격이 업무에서는 큰 장점이라는게 부하직원들의 평가다. 무엇보다도 지시가 명확하고 결과에 대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 또 부처의 업무추진을 뒷받침해주는 힘도 된다.이밖에도 강장관의 면모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예화는 숱하게 많다. YS정부 출범 초기 공직자 재산신고 때 경제부처에서 제1착으로 신고한 일은 청렴도면에서 그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또 군산사범을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바로 대학에 진학을 못하고 초등학교 선생을 지낸 일은 사회안전망이나 분배문제 등에 대한 그의 유별난 관심을 설명해준다.한편 강장관은 이번에 재경부에 부임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재경부 장관을 아주 오래할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는 장관의 임면권이 대통령에게 있음을 고려하면 극히 이례적인 발언이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있는 것이다. 강장관이 그 자신감을 실전(경제운영)에서도 입증해 보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