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의 수난시대」.정부의 서슬퍼런 개혁 칼날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재벌 총수를 두고대기업 임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대기업 총수들이 위축돼있다. 일상적인 업무를 챙길 뿐 예전의 왕성한 기업 활동은 좀체 찾아볼 수 없다. 공식 행사에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 이같은현상은 한진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 후 한층 심화됐다.지난 9월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도 정몽구 현대, 이건희 삼성, 구본무 LG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선약 및 개인 일정을불참 사유로 달았다. 모그룹 회장은 전경련 기자단과 오찬 모임을약속했다가 돌연 일정을 취소했다. 그만큼 총수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든 셈이다. 재계 현안에 대해 속내를 잘못 비쳤다가 낭패를 볼 수있다고 생각한다. 난세에는 역시 근신이 최고라는 인식이 어느새 뿌리를 내렸다.재계가 가장 겁내는 점은 갈수록 거세지는 정부의 재벌 개혁 강도이다. 지난해 1월에는 대통령이 5대그룹 총수로부터 재벌 구조조정 5대 원칙 이행을 위한 약속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다소 고통은 따르겠지만 정부의 개혁정책에 따르겠다는게 재계의 분위기였다.그러나 구조조정의 5대 원칙은 개혁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고 구조조정 청사진을 제시해야 했다.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생살을 떼내는 마음으로 자산과 사업을 넘겨야했다.(김승연 한화 회장)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의 재벌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는「아직 멀었다」였다. 지난해 하반기들어 대기업의 기업어음(CP)발행을 제한하고 투신사로 하여금 회사채 편입을 제한했다. 해외는물론 국내의 직·간접시장에서 돈줄이 막힌 대기업은 쓰러질 수밖에없었다. 대우 그룹의 좌초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재벌 총수 위축 …공식 행사조차 꺼려올들어 우리 경제가 급속히 회복세를 타면서 재벌 기업들이 한숨을돌리게 되자 정부의 압박 강도는 한차원 높아졌다. 공정위가 끊임없이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한 후 과징금을 물렸다. 재벌 입장에서 공정위 조사는 이제는 일상사가 되다시피했다.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주가조작 및 세무조사를 일제히 강화했다. 이를 두고 재계는 정부가 실패한 오너 경영인을 청산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진그룹과 대주주일가에 5천4백억원 이상의 세금을 추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국세청의 고발로 검찰이 조세포탈과 외국환 관리법 위반 혐의를수사할 경우 결과에 무관하게 조회장 일가는 엄청난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그 정도로 많은 세금을 추징당하고 기업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재계가 불안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가 오너의 개인비리에 초점을 맞추고 개혁을 압박하는 것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다.국세청은 삼성 및 3, 4개 그룹 일가에 대해 깊숙이 내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가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하고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현대그룹의 현대전자 주가조작에 대한 검찰 수사도 생생한데 세무조사까지 강화되니 기업 입장에서 여간 불안한게 아니다.재계는 정부의 전방위 압박이 적어도 연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고있다. 재벌 개혁의 가시적인 성과는 내년 총선의 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개혁의 고삐를 당길 것으로 예상한다. 누구보다 대기업의 생리와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김대통령이정권의 성패를 재벌 개혁의 정도로 평가받으려 한다는 분석도 없지않다. 재벌 총수는 자신에 대한 정부의 압박을 일회성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