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IT업체면 가리지 않고 투자 … ‘구경제’ 기업들은 돈 못구해 한숨

미국의 정보통신 회사인 노스포인트 커뮤니케이션즈 그룹.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2천1백10만달러에 불과했던 반면 그 9배 가까운 1억8천4백만달러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아무리 전도 유망한 벤처기업이라고 해도 이쯤이면 월가의 기업 분석가들로부터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그런 회사가 최근 투자 자금을 조달한답시고 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 등 쟁쟁한 월가 투자금융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2억달러어치의 정크본드를 발행하려고 하니 주간사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골드만 삭스와 모건 스탠리는 ‘긴가 민가’하면서도 일단 채권 발행을 주선해줬다. 그러자 믿기 힘든 현상이 나타났다. 이 회사가 정크 본드를 발행한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무섭게 ‘사자’ 요청이 쇄도한 것이다. 희색이 만면해진 노스포인트사는 당초 계획의 배나 되는 4억달러어치의 채권을 성공적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대형 기관투자가·대기업까지 투자 혈안이 에피소드는 요즘 금융시장에서 일고 있는 ‘신경제’ 붐이 어느 정도로 극성스러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 정보통신(IT) 등 이른바 ‘신경제 섹터’의 기업들은 청탁을 따지지 않는 투자 자금의 유입으로 ‘돈 풍년’을 만끽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첨단 하이테크 군단’의 반열에 끼지 못한 ‘구경제’ 기업들의 한숨과 시름이 아프게 배어 있다. 구경제 기업들은 어지간히 재무제표가 탄탄하지 않고서는 투자자들을 확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최근의 정크본드 시장은 이런 흐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골드만 삭스사에 따르면 올들어 세계 정크 본드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소화된 채권 물량의 88%가 정보통신, 미디어, 하이테크 등 ‘신경제’ 기업들의 발행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반 제조업체들의 경우는 정크본드 시장 점유율이 6%로 작년에 비해 절반 이상 뚝 떨어졌다. 대부분의 구경제 기업들에게 일반 채권시장은 ‘그림의 떡’일 뿐, 훨씬 더 높은 금융 비용을 감수하고 무담보 채권 또는 전환사채(CB)를 발행하거나 은행 융자를 얻어 필요 자금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는 처지다.자금 흐름이 비교적 보수적이라는 채권시장이 이럴 정도니 ‘냄비’ 성향이 짙은 주식시장 쪽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미국 주식시장에서는 요즘 ‘디버전스(divergence)’라고 불리는 업종간 주가 차별화 현상이 극단을 치닫고 있다. 인터넷과 IT, 생명공학 등 신경제 관련 주식들은 천정부지의 상승 행진을 지속하고 있는 반면 ‘기타 업종’의 주식들은 대부분이 개별적인 기업 내용을 불문하고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다우존스 지수와 나스닥 지수의 엇갈린 행진이다. 전통적인 대형 우량주 중심의 다우존스 지수는 지난 1월14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한달 남짓한 사이에 13% 이상 급전직하하는 부진을 보이고 있는 반면, 첨단 하이테크주 위주의 나스닥 지수는 올들어 10% 가까운 상승세를 기록중이다.유행에 민감한 개인 투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석 위주의 보수적인 분산 투자로 유명한 연금 기금 등 대형 기관투자가, 여유 자금을 금융시장에서 굴리는 대기업 등 돈줄을 쥔 투자자들은 거의 모두 ‘신경제’ 투자에만 혈안이 돼 있는 양상이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 등 ‘테마 업종’의 벤처 기업들이 노른자위 투자 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들 분야의 벤처 기업이라면 내용을 크게 따지지도 않고 돈부터 들이대기에 급급해하고 있다.‘신경제’를 화두로 한 투자 붐이 뜨겁게 불붙으면서 투자 패턴도 한층 대담해지고 있다. 신경제 업종의 벤처 기업들이 채권 발행 내지는 주식 상장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창업 단계에서 ‘입도선매’하는 투자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전미벤처캐피털협회에 따르면 미국내 벤처기업들에 대한 투자는 지난해 4백80억달러로 전년대비 1백50%나 증가했으며, 올들어서는 통계를 잡기조차 힘들 정도로 투자 자금이 쇄도하고 있다. 요즘 미국 주식시장이 공전의 활황을 보이고 있다지만 연간 수익률이 평균 두자릿수를 넘기 힘든데 비해, 웬만한 벤처 투자는 수익률이 거뜬히 세자릿수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벤처 투자 열풍에 따라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갖가지 기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벤처 회사인 액셀 파트너스사는 최근 4억5천만달러를 사모방식으로 조달키로 하고 기존 거래선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2주일만에 20억달러어치의 투자 요청이 들어왔다. 액셀 파트너스측은 한푼이라도 더 돈을 대겠다고 우겨대는 투자자들을 설득하느라 오히려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같은 실리콘 밸리 기업인 레드포인트 벤처스사 역시 얼마전 7억달러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믿기 힘든 ‘사건’을 경험했다. 몇몇 투자 희망자들이 이 회사의 간부들에게 야외 파티용 음식 세트와 같은 고급 선물을 전달하는 등 ‘선심 공세’를 펼친 것이다. 이처럼 요즘 미국 금융시장에서는 돈을 빌리는 쪽이 아니라 빌려주는 쪽에서 더 애간장을 태우는 주객전도의 양상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뭉칫돈을 쥐고 있는 투자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유망 벤처’로 점찍은 기업들에 전화를 걸어 “제발 우리 돈좀 써달라”고 청탁하는 진풍경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요즘이다. 최근에는 유럽의 백만장자들까지 벤처 투자 행렬에 가세해 미국행 비행기를 바삐 오르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미국 금융계를 휩쓸고 있는 ‘신경제’ 벤처 투자 열풍은 기관 투자가들이 내부적으로 엄격히 지키고 있는 투자 기준을 ‘현실에 맞게’ 바꾸고 있는데서도 뚜렷하게 감지된다. 코네티컷주의 펀드 회사인 오프로드 캐피털사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정 수준의 소비자와 외형을 갖춘 기업’으로 투자 대상을 국한시켰다. 그러나 최근 신경제 분야의 유망 벤처기업들 중 상당수가 이런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자 ‘기준’을 과감하게 철폐했다. 이렇다 할 외형도 없고, 아직 마땅한 소비자들도 나타나지 않은 신생 기업이더라도 사업 개념이 유망할 경우 얼마든지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프로드사는 이런 새 기준에 따라 올들어서부터는 운영 자산의 10%는 무조건 신경제 창업 기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또 다른 투자 회사인 T 로 프라이스 과학 기술 펀드는 인터넷 벤처 기업이 일정 수준의 매출 등 상장 요건을 갖춰 IPO(기업 공개)를 하기 직전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 적중, 순식간에 ‘돈방석’위에 올라 앉았다. 인터넷 캐피털 그룹이라는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벤처업체가 IPO를 하기 얼마 전에 1천만달러를 투자했는데, 이 회사가 상장한 뒤 주가가 폭등세를 거듭한 바람에 3억달러의 투자이익을 낸 것이다.이런 식으로 신경제 벤처 기업들에 투자해 거액을 벌었다는 ‘성공 스토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면서 여유 자금을 이 분야 투자로 운영하는 통 큰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컴퓨터 시스템 회사인 오라클사는 지난해 벤처 기업을 대상으로 1억달러를 운영, 5백4%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나자 올들어 투자 자금을 다섯배나 늘렸다.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그 자신이 벤처 기업 출신인 ‘신경제 맏형 회사’들도 여유 자금을 벤처 투자로 대거 운영하고 있다.이처럼 갈수록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 신경제 벤처 투자 붐에 대해 “증시보다도 거품이 더 큰 것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도 커지고 있다. 벤처 기업은 말 그대로 아직 성패 여부가 분명치 않은 ‘모험’ 단계의 회사인 만큼 투자 자금이 고스란히 휴지조각으로 바뀔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스티븐 세체티 교수는 최근 한 논문에서 “벤처 기업들이 상장도 하기 전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벤처 캐피털의 증권화 내지 민주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벤처 기업의 창업 초기 단계에서 다양한 투자자들이 참여할 경우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분산되고, 그에 따라 그 기업이 도산하건 성공하건 간에 그 과실이 보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므로 사회적 충격 완충 효과가 높아진다는 논리다. 갈수록 열기를 더해가는 신경제 투자 붐의 ‘과열’ 가능성을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hyrhee@earthlink.net◆ 용어설명정크본드(junk bond):투자부적격 신용등급의 회사가 발행한 채권. 이자율은 높지만 상환여부가 불확실한 고위험-고수익 채권.디버전스(Divergence·역배열):기술적 지표와 지수간의 이탈, 괴리를 의미한다. 즉, 주가가 하락세를 지속하면서 저점을 낮추어 가는데 지표는 고점을 높여가는 양상을 보일 때나 그 반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본래 차트 기술적 분석시 사용하던 용어로, 최근에는 다우존스의 전통적 대형주 주가가 추락하고 첨단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등록 기업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현상을 지칭할 때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