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산업이 새 천년들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 경제를 이끌어온 자동차산업이 위기를 맞은 것은 올해만이 아니다. 1, 2차 석유파동 당시에도 자동차산업은 수출과 내수시장에서 수요가 얼어붙는 바람에 구조조정이라는 홍역을 치렀다. 한국 자동차업계는 다행히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천년 시작과 동시에 맞고 있는 지금의 위기 상황은 그때와 차원을 달리한다. 오일쇼크 당시의 위기가 단편적이고 1차원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의 위기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든든한 방어벽도 허물어진 상태다. 오일쇼크 당시에는 통상문제가 이슈화되지 않아 내수시장을 독식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선진 자동차업계는 한국 자동차시장 개방을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다. 올해 들어 공세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내수시장은 이제 더 이상 한국 자동차업체들만의 독점시장이 아니다.한국 자동차산업을 사면초가상태에 몰고 있는 주범은 다름아닌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빅5’다. 지난해 두 회사간 합병이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덩치키우기에 나섰던 이들 ‘빅5’들은 올해 들어 3각 합병이나 또다른 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를 추진하며 세계 자동차시장 새판짜기에 나서고 있다. 메가 머저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다임러크라이슬러가 일본 미쓰비시와 전략적 제휴를 성사시켰는가 하면 지난해 볼보를 인수한 포드는 독일 BMW로부터 랜드로버를 또다시 인수키로 했다. 포드의 세확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랜드로버 인수를 계기로 포드와 BMW의 합병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대우자동차 한 임원은 “90년대 후반 세계 자동차시장이 메이저 5대회사 내지는 10대회사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국내 자동차업체들은 반신반의했다”면서 올들어 이 예상은 급속히 현실화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메가 머저' 특급호 합승할 수 있을까대우자동차 임원의 이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한국 자동차업체의 선진메이커를 중심으로 한 새판짜기에 합승은 이런 저런 사유로 여의치 못하다. 3월초 국내 자동차산업을 이끌어온 현대자동차가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전략적 제휴방침을 밝히고 성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임러크라이슬러로부터는 아직 이렇다할 응답이 없다. 다임러가 미쓰비시와의 전략적 제휴를 맺은 뒤 현대의 러브콜에 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이런 상황을 감안,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도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덩치로는 세계 자동차업계의 새판짜기에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면 대우를 인수, 보다 덩치를 키운 뒤 전략적 제휴에 나서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수시장 독점 '이제 끝'내수시장은 이제 더 이상 국내 완성차업체들의 독점시장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팎에서 이를 막아줄 방어벽은 없다.먼저 국내시장 판도가 그렇게 변했다. 대우와 삼성자동차가 어떻게 처리되든 간에 국내 자동차시장은 현대 대 외국업체간 양자 대결이 불가피하다. 삼성은 이미 르노가 인수방침을 밝힌 뒤 실사에 들어간 상태며 대우자동차 또한 이변이 없는 한 외국업체로 넘어갈 확률이 높다.이런 상황에서 이미 진출한 외국차 수입업체들의 국내시장 판매공세도 거세지고 있다. 최근 경기가 호전되면서 외국차 판매가 늘어나자 외국차 수입업체들은 신 모델을 대거 투입해 대대적인 판촉전에 나서고 있다. 일본 도요타의 진출도 한국 자동차업체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도요타는 이미 딜러모집을 마치고 2001년1월 한국시장에 상륙한다.국내 자동차산업의 버팀목이었던 내수시장이 외국업체들에 송두리째 넘어갈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위기탈출 해법은 없는가전문가들은 그렇다고 해서 한국 자동차산업 장래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진단한다. 단편적인 위기는 단편적인 처방에 그치지만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위기는 잘 극복하면 그 경쟁력은 배가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역발상 경영’을 한국 완성차업체들에 주문한다. 올들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 자동차 메이커들의 전략적 제휴 흐름을 기피하지 말고 앞장서 동승하라는 것이다.한국산업연구원 오규창수석연구원은 “대우와 삼성자동차가 어떻게 처리되는냐에 관계없이 내수시장은 외국업체들에 상당부분 잠식당할 것”이라며 오히려 이를 계기로 기술개발 및 경영합리화를 과감히 추진하면 한국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진단한다.오연구원은 “외국차의 경우 중소형차부문에서는 현대자동차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면서 이런 강점을 살리고 현재 현대가 추진하고 있는 기아와의 플랫폼공유, 공동기술개발 등 경영합리화가 무리없이 추진되면 결코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