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생·주부·퇴직자 등에 눈돌려 … 돈보다 유연 근무시간제·복지혜택으로 유혹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를 지닌 한국 속담이다. 요즘 미국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처한 상황이 꼭 이렇다. 10년째에 접어든 미국 경제의 초장기 호황 덕분에 일손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반면, 마땅한 일손을 찾기는 갈수록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 담당자들이 비상 인력수급 계획을 짜내느라 고심하고 있다. 미국내 실업률이 4.1%로 사실상 완전 고용상태를 지속하면서 가용 인력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구인난에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 기업들은 상황 타개를 위해 ‘대용 인력’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대용 인력이란 적극적인 취업 의사가 없거나,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취업 기회를 잡기 어려운 정년퇴직자 주부 대학생 등 취업 예비집단을 가리킨다. 경제학 용어로 하면 ‘자발적 실업자’들이다. 16세부터 64세까지의 민간인 가운데 적극적인 취업 의사가 없는, 그래서 ‘경제활동 인구’에서 제외돼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 실업자로 분류된다. 2월말 현재 미국에서는 이 자발적 실업자가 3천6백30만명에 달한다.미주리주 캔자스 시티 소재 컴퓨터 서비스 회사인 H&R 블록사는 자발적 실업자들을 끌어들여 구인난을 해결해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 회사는 6백여명의 대학생들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해 심각한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기술지원 센터 등에 배치, 급한 불을 껐다. 아르바이트라고는 해도 1주일에 25시간 가량씩 일을 맡겨 웬만한 정규직만큼의 업무를 소화시키고 있다. 이 회사가 기술지원 센터의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임금은 시간당 11.54달러. 전화 교환실에 배치한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이보다 낮은 8~9달러만을 지급한다. 최저 임금을 겨우 넘어서는 낮은 수준이다.◆ H&R 블록사 대학생 끌어들여 해결별로 좋을 게 없는 조건을 갖고도 대학생들을 일자리로 이끌어낸 것이야말로 H&R 블록사가 자랑하는 노하우다. 이 회사가 사용한 노하우는 강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대학생들의 특수 사정을 감안, 근무 시간을 스스로 정하게 하는 ‘유연 근무시간제(flexible treatment)’ 등 몇가지의 유인책을 제공한 것이다. 출퇴근비 보조를 비롯해 상품 할인구매권, 무료 식사, 등록금 보조 등의 후생복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8만달러를 들여 소프트볼 구장을 꾸몄다.H&R 블록사뿐 아니라 많은 미국 기업들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어가며 인력난 타개라는 힘든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대학생이나 주부, 정년 퇴직자들 외에 도시 빈민과 제대 군인, 장애인, 불법 체류자 등 발굴 가능한 취업 예비집단을 앞다퉈 공략하고 있다. 심지어 기존 회사원들을 상대로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모집하고 있다.미국 경제는 역대 최고의 번영기로 분류되는 지난 60년대에도 한때 실업률이 4%를 밑도는 등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베이비 부머’로 불리는 전후의 다산세대들이 대거 취업 시장에 유입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호재가 없다. “미국 기업들은 인력 채용에 관한 한 요즘 전인미답의 신천지를 개척해나가고 있다”는 로렌스 카츠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상황이다.미 통화당국의 수장인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이 지난해 6월 이후 다섯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하는 등 금융 긴축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상황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업들이 채용할 수 있는 가용 인력이 바닥을 드러냄에 따라 노동시장에서의 수요 공급 원칙에 의거, 전반적인 임금 수준이 올라가고 이는 기업의 비용 상승에 의한 인플레로 이어질 것이라는게 그린스펀 의장의 확고한 믿음이다.그러나 FRB의 이같은 금융정책에 대해서는 클린턴 행정부내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틴 베일리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이다. 그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노동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임금 상승 압력이 가시화하지 않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알렉시스 허만 노동부장관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앨런 그린스펀은 유능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FRB의 노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 경제는 요즘 매우 견실하고 안정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며 그린스펀 의장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이처럼 미 행정부 내에서 노동 수급 상황 및 그에 따른 인플레 여부를 놓고 이견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가용 인력’에 대한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 탓이다. 노동부는 일자리가 주어질 경우 언제든 취업이 가능한 가용 인력이 현재 1천3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는 반면 FRB는 6백만~1천만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양측의 통계가 다 노동통계청이 실시하는 설문 조사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양측의 통계가 다른 것은 노동부는 설문 조사때 “현재 파트 타임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근무 시간을 더 늘리고 싶다”고 응답한 3백만명을 가용인력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FRB는 이들이 일단 일자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용인력에서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일자리를 찾고 있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취직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4백만명도 진정한 의미의 가용인력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FRB가 96년1월 시점에서 조사했을 때의 가용인력은 1천3백만명에 달했었다. 4년 남짓한 사이에 가용 인력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그러나 FRB와 노동부의 통계는 H&R 블록사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업들이 적극 개발하고 있는 대학생 등 비자발적 실업자들을 아예 제외시킨 것이어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3천6백30만명에 달하는 자발적 실업자들은 기업들이 하기에 따라서는 일터로 끌어들일 소지가 충분한 대용 인력이라는 얘기다. 특히 일부 도시 빈민들의 경우는 노동 통계를 위한 설문 요원들의 방문 조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린스펀 의장이 이끄는 통화 당국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은 통계에 지나치게 얽매여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용인력층 공략 인건비도 줄여FRB의 ‘완전 고용에 의한 비용 상승 인플레 우려’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캔자스 시티의 경우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캔자스 시티의 실업률은 미 전국 평균(4.1%)보다 0.9% 포인트 낮은 3.2%에 불과하다. 노동시장이 그야말로 완전 고용 상태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많은 기업들이 H&R 블록사처럼 임금을 많이 주지 않고도 원하는 만큼의 인력을 어렵지 않게 뽑아 쓰고 있다. 통계의 허점이 무엇인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인력 수급과 인플레간의 상관 관계에 대한 FRB의 가설이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몇가지의 추가적인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거리 전화회사인 스프린트의 캔자스 시티 지점은 종업원들에 대한 초봉을 최저 임금 수준인 시간당 8.25달러로 묶어놓고 있다. 대신 주로 대학생들을 파트 타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임금 외의 갖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인력난에 원활하게 대처하고 있다. 강의 시간표에 맞춰 근무 시간을 신축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끔 ‘유연 근무시간제’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 1년 이상 근속할 경우 연간 5천2백50달러까지 등록금을 지원하는 식이다.지난 97년 캔자스 시티에 개장한 종합 카지노 센터인 스테이션 카지노스사도 대용 인력층을 공략해 큰 임금 인상 없이 구인 문제를 해결해냈다. 이 회사가 공략한 인력시장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갓 이민와 취직이 여의치 않았던 사람들이다. 스테이션사는 이밖에도 90여명의 정년 퇴직자를 채용했으며, 이미 직장을 갖고 있는 2백70여명을 야간 내지는 주말 아르바이트 등으로 고용했다. 이들에게도 높은 임금을 주기 보다는 통근 버스를 제공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통해 소속감을 높이게끔 하고 있다.미국 경제가 벌써 몇년째 4%대 초반의 낮은 실업률을 유지하면서도 인플레 위협없이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이면에는 이같은 기업들의 지혜가 단단히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