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달러 환율이 1백4∼1백7엔의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나 일본 경제 모두 환율을 한 쪽 방향으로 끌고 가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음을 뜻한다. 99년 4분기에 7.3%의 높은 경제성장을 거둔 미국은 최근 들어 경기상승세가 약간 둔화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미국 내수경기를 가늠하는 소비자신뢰지수가 2개월 연속 하락했으며 내구재 주문은 감소세로 돌아섰다. 그렇지만 아직도 펀더멘탈스는 과열 우려를 낳을 정도로 강력하다. 때문에 연준리(FRB)가 경기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해 5월 공개시장위원회에서 현재 6%인 기준금리를 25bp(basis point, 이자율 계산의 최소 단위로 1%는 100bp) 이상 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이론적으로 미국의 금리인상은 달러표시 자산에 대한 선호를 높여 달러화 강세요인으로 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주식시장이 금리인상의 충격을 제대로 소화해낼 경우에만 적용된다. 그동안 미국은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자본수지로 보전해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91년 이후 연평균 17%의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주식시장이 있었다. 주식시장의 장기 호황이 막대한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면서 달러화 강세의 주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그러나 계속되는 금리인상 압력과 유명 시황 전략가들의 거듭되는 경고로 이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다우지수가 10,000 포인트를 하향 돌파하는가 하면 기술주가 대거 포진한 나스닥 시장은 거품 논쟁과 함께 본격적인 조정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높은 생산성 향상과 세계적인 경기호조로 기업들의 수익전망이 여전히 양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하향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해외자본의 유입 유인을 떨어뜨리고 달러화 강세에 걸림돌이 된다.일본은 미국과 대조적이다. 주식시장이 엔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닛케이 지수가 2만엔대에 안착하면서 주가는 상승 모멘텀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경제 펀더멘탈스가 양호해지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2월 산업생산이 3.0% 늘어나고 기업의 체감 경기를 나타내는 단칸지수가 5분기 연속 상승하는 등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주가상승을 겨냥, 해외자본도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다. 올해 들어 2월까지 일본 증시에 순유입된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9천2백억엔으로 작년 동기에 비해 37.6% 증가했다. 이러한 국제자본의 일본 주식 투자 붐은 엔화 수요를 늘리기 마련이다.문제는 일본이 아직 엔화 강세 기조를 수용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IMF를 비롯한 주요 연구기관은 일본 경제가 올해 1.5% 내외의 성장률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99년의 성장률 0.3%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이지만 4%대로 예상되는 미국에 비하면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 요컨대 일본은 이제 장기간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지나친 엔화 강세는 지난 10년간의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려는 일본 경제에 찬물을 끼얹을 우려가 있다.금년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은행(BOJ)의 시장 개입은 이러한 일본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반적으로는 엔화 강세 요인이 우세한 편이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지나친 엔화 강세를 바라지 않는데다 미국 역시 환율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자산유출을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미 증시의 급격한 조정 등과 같은 충격요인이 발생하지 않는 한 엔/달러 환율에 기조적인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운 여건이다. 당분간은 시장의 엔화 강세 분위기와 일본은행의 정책적 개입으로 1백4∼1백7엔의 박스권 흐름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