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자기개발, 퇴근 뒤 또다른 일 찾아 구슬땀 … 명함·휴대폰 2개 가진 직장인 급증

요즘 잘 나가는 모 인터넷 벤처기업 재무 파트 이상철 부장(가명, 41) 지갑엔 두개의 명함이 들어 있다. 하나는 재무팀 부장이라는 명함이고 다른 하나는 재무 컨설턴트라는 명함이다. 낮엔 회사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을 하지만 밤엔 신생 벤처기업의 재무 컨설턴트로 변신한다. 그런 탓에 이부장은 두 가지 명함을 들고 다닌다.요즘 이부장처럼 두개의 명함을 갖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직장생활을 통해 터득한 능력을 다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른바 멀티유저(One-source Multi-user)들이 업종을 불문하고 속속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 고용불안으로 다중직업 필요성 절감모 시사주간지에서 프리랜서로 창업과 샐러리맨 트렌드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는 이혜숙씨(가명, 28)도 두개의 휴대폰을 갖고 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다. 올해 초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이부장처럼 명함 두개를 만들었다. 주간지 프리랜서로 뛰면서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월 평균 10여명의 사람들을 헤드헌팅 업체에 소개해주고 그가 받는 연봉은 1천5백만원.이씨가 헤드헌터라는 또다른 직업을 갖게된 밑천은 3년간 현장에서 취재하면서 모은 4백여장의 명함. 그는 “두가지 일이 서로 얽혀 있어 경제적인 도움뿐 아니라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헤드헌팅 업체는 나를 통해 스카웃하려는 사람을 검증할 수 있고, 나는 이들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이같은 경향에 대해 직업평론가인 김농주씨는 “미국엔 8백만명이 두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고 있다. 단지 돈을 더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한가지 직업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에 직업관도 멀티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직장인들이 밤과 낮을 주기로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사회적인 요인도 크다. IMF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정규직 보다는 계약직이나 연봉직 사원 채용을 크게 늘렸다. 이런 변화에 맞서 직장인들도 자기 개발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자연히 직장인들은 또 다른 전공분야를 찾거나 자신의 능력을 다른 곳에 활용해 수익을 낼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김경숙 박사는 “직장내 계약직과 임시직 직원의 비율이 IMF 전과 비교해 16%가 늘었다. 이 때문에 생긴 고용불안으로 샐러리맨들은 한가지 기술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관리직 직원도 요리사 자격증을 따야 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했다.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중직업 현상은 단지 샐러리맨들의 생존 수단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평생 한가지 일에만 매달려 사는 것 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재평가해 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국내 A은행 외환딜러인 박기환씨(가명, 37)가 대표적인 사례다. 박씨는 그간 딜러로 일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중소기업들이 환리스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다른 딜러들과 정보를 공유할 필요를 느낀 박씨는 동료들과 ‘fxmarket.com’ 이라는 외환거래 관련 무료 정보사이트를 만들었다.◆ 능력 재평가 기회 … 돈도 벌고 일석이조박씨는 딜링룸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외환시장에서 일어나는 뉴스와 메이저급 시장참여자들의 동향 등에 관한 정보를 올리기도 하고 업무가 끝난 저녁때는 내일 장 전망 등의 글을 쓴다.박씨는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간 구체적인 외환 시장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몇몇 선물회사에서는 하루 종일 사이트를 열어 두고 내가 올린 정보를 참고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그러나 한 직장인이 여러 개의 직업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에 우려의 시각을 보내는 전문가도 있다. 인재파견업체인 휴먼링크 장남기 사장은 “이중직업은 취업규칙에 불법으로 되어 있다. 한 직장에서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은데 다른 일을 한다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회사로서도 손해를 보게 된다”고 지적한다.밤에는 쉬어야 다음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데 올빼미처럼 밤에 직업을 갖고 활동하다보면 결국 서로 손해만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장사장의 분석이다.장사장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두개의 명함을 갖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이 늘어날 전망이다.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도 이제 낮엔 봉급장이, 밤엔 사장님으로 변신하는 ‘다중직업’시대에 들어섰다.★ 인터뷰 / “교수·사업가 1인2역 보람”"주우진 재스퍼오토 사장 (서울대 경영대학 부교수)“교수·사업가 1인2역 보람”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카123’의 아담한 사무실. 한쪽 책상에 앉아 있던 이 회사 대표이사 주우진(40, 아래사진)사장이 명함을 내밀었다. 이 명함에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부교수 주우진’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지난 3월 자동차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는 (주)재스퍼오토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카123 사장이라는 명함을내밀면 높은 분들이 상대를 해주지 않아’ 주로 교수 명함을 사용하게 된다고.교수라는 ‘멀쩡한’ 직업이 있는 그는 왜 또 하나의 일을 갖게 됐을까. 마케팅, 특히 자동차 산업을 10년간 연구해왔던 주교수는 항상 자신의 연구를 실물 경제에 연결해 보고 싶었다. 97년 미국 버클리대 MBA 과정에서 강의를 할 때 수강생중에 벤처기업 경영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자극을 받아 99년5월 서울대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을 벌였다. 처음에는 뒤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결국 대표이사로 일선에 나섰다.사업은 일단 순항중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자동차 제조사와의 거래선도 확보해 4월말부터 B2B서비스도 시작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다. 올해 매출 목표액은 70억원.요즘 주교수는 하루씩 번갈아 학교와 회사로 출근한다. 6시에 일어나 수영으로 체력관리를 한 뒤 집을 나선다. 학교로 출근하는 날은 오후 3시까지 강의를 하고 저녁 때 회사로 간다. 사업 관계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다 보면 퇴근은 10시를 넘기기가 일쑤다. 대표로 정식 취임한 후로는 주말에 쉬어 본 기억이 없다. 몸은 힘들어도 주교수는 요즘 생활에 대단히 만족하는 듯 했다.“인터넷 사업은 특히, 실무가 이론을 앞서갑니다. 사업 경험을 섞어서 가르치니까 학생들도 생생한 강의라고 좋아하더군요.” 또 연구만 하면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정체되기 쉽다. 사업을 하면서 그는 연구 주제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학교에는 3월1일자로 겸직을 신청, 3년 기한을 보장받았다.강의시간을 줄여준다든가 하는 지원은 받지 못했지만, 학교측의 반응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경제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주교수가 학교에서 받는 연봉은 3천만원 가량. 재스퍼오토의 대표이사 연봉은 6천5백만원이다. 기업공개는 하지 않았지만 펀드매니저들은 그가 보유한 주식 평가익이 최소 2억원, 최고 20억원 정도는 될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물론 나쁜 점도 있다. 1인 2역을 하는 것은 역시 고달픈 일이다. 또 학교에만 있을 때 비즈니스에서 오는 중압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그는 요즘 ‘스트레스를 팍팍’ 받고 있다.“궁극적으로 교수인가 사업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라는 질문에 주교수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아직은 모르겠다. 회사가 기반을 잡으면 물러나 교수로 돌아가지 않을까” 조심스런 대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