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7개월 전 아랫배의 갑작스런 통증으로 인근 병원에 갔다가 급성 충수염이라고 해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 결과 급성 충수염이 아니라 소장의 끝 부분인 회장이 터졌다는 것이다. 그 부위를 잘라내고 퇴원한지 몇 개월만에 다시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설사를 자주 해 수술받았던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여 필자를 찾아왔다.A씨의 대장을 내시경으로 검사해보니 수술할 때 잘라내고 대장과 이은 소장 부위에 커다란 궤양이 생긴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베체트씨병이다. 터키 의사인 베체트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매우 악질적인 병이다. 이 병은 장이 헐고 터질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이곳 저곳에 병을 유발한다. 입안이 심하게 헐어 밥 먹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또 성기 근처가 헐어 환자를 괴롭게 하며, 눈 안에도 염증이 생겨 시력 장애를 가져오고, 피부에 발진이 잘 생긴다. 이외에 관절염 뇌염 혈관염 고환염 등도 생길 수 있다.이런 여러 병들이 모두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번갈아 가며 여기 저기에 나타나게 된다. 필자가 근무하는 서울대병원에서 베체트씨병으로 진단된 환자들의 거의 대부분에서 구강궤양이 나타나며, 성기 궤양은 반 이상, 피부 발진은 4분의 1 이상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별 이유 없이 구강이나 성기에 궤양이 생기고 배가 아픈 사람은 베체트씨병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이 병의 원인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병변 부위의 조직검사를 해보면 혈관에 심한 염증이 있는데 왜 혈관염증이 생기는지 잘 모른다. 외부에서 병원균이 들어오거나 독소가 들어와 생긴 것은 아니고 우리 몸의 면역기전 이상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베체트씨병은 동양인에게 많고 서양인에게는 드문 병이다. 동양에서도 동남아시아와 중동아시아에 특히 많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이 병의 빈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입안이나 성기가 헐거나 장이 허는 것은 매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이 병을 초기에 진단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입과 성기, 장이 헐고 피부 발진이 생기는 것이 동시에 발견되면 쉽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러나 장이 헌 것은 장결핵, 크론씨병 등 다른 병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조직검사, 배양검사 등을 통해 감별해야 한다.이 병이 고약한 점은 우리 몸의 여러 곳을 침범할 뿐 아니라 약물 치료로도 효과가 썩 좋지 않고, 좀 나았다 싶다가도 반드시 재발한다는 것이다. 장이 심하게 헐거나 터져 수술을 하면 대개 A씨처럼 1년 이내에 수술한 부위 근처에서 재발한다. 그렇다고 포기할 병은 아니다. 스테로이드·이뮤란 등의 면역억제제, 설파살라진 등의 항염증제, 콜키신 같은 약물을 동시에 투여하면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필자는 베체트씨병 환자를 진료하며 절반 이상의 환자가 병변이 좋아지거나 완치된 경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병이 좋아지거나 완치되더라도 재발 방지를 위해 약물을 계속 투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베체트씨병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은 부작용이 많으므로 반드시 전문의의 지시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베체트씨병은 환자의 굳건한 투병 의지, 의사의 정성스런 치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병이다. (02) 760-2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