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급한 불 껐다’ 공치사보다 시스템 위기 치유나서야 … 저금리정책도 재고해볼 시점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이 최근 국회재경위에 출석, 답변에 앞서 생각에 잠겨있다.최근 들어 동남아와 우리나라에서는 제2의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제2의 경제위기론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우문에 대한 대답은 한 국가의 위기가 어떤 과정을 밟으면서 진행되는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감(感)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일반적으로 개도국 위기는 크게 세단계를 거친다. 우선적으로 대외신용을 지킬 수 있는 외화유동성에 금이 가면서 생기는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일단 외환위기를 겪게 되면 우리나라와 동남아처럼 기업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때 담보관행이 일반화된 국가에서는 금융위기로 진전되는 것이 관례다.외환위기로 기업부도가 속출하면 담보가치가 급락하게 되고 금융기관들은 부실채권을 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로 실물부문에 필요한 기름(돈)을 공급해 주는 엔진장치에 해당하는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게 된다. 물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적으로 외화유동성을 확보해 대외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바탕으로 위기를 낳게 한 부실을 털어내야 금융 혹은 경제시스템이 복원될 수 있고 경제도 안정될 수 있다.외화유동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과 구조조정을 추진하면 경제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예로 중남미 국가들이 해당된다. 중남미 국가들의 경우 외환위기를 겪은지 무려 20여년이 지났지만 경제가 늘 불안한 것도 외환위기 극복과정이 이같은 수순을 제대로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동남아 국가중에서는 인도네시아가 해당된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는 외화유동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최근 와히드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불확실함에 따라 경제주체들의 경제이기주의로 외화유동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건까지도 악화되고 있다.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98년에 3백90억달러, 지난해에는 2백50억달러에 해당하는 경상수지흑자로 여타 금융위기 국가에 비해 외화유동성을 빨리 확보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가 회복될 수 있었고 국가신용등급도 불과 1년만에 다시 투자적격 단계로 조정될 만큼 해외시각이 개선될 수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내에서는 위기론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면 공교롭게도 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몰릴 당시와 마찬가지로 정책당국에서는 거시경제지표의 양호함을 들어서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소위 ‘펀더멘털론(fundamentals)’을 들어 강조하고 있다.◆ 주식투자자들 경제 위기 체감반면 시장에서는 주식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우리 경제의 위기감을 체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소한 시간이 갈수록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외적으로도 우리 경제를 보는 해외시각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우리 경제현안에 대한 인식도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얼마전에 관심을 끌었던 ‘꽃밭론’과 ‘바가지론’을 들어보자. 정책당국자는 급한 불을 끄다 보면 꽃밭을 밟게 되는 소방관에 비유해 ‘꽃밭론’를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난 2년간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한 결과 이제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도 회복되고 있다는 얘기다.이 과정에서 저지른 사소한 일로 최근 들어 우리 경제의 불안감이 높아진다고 해서 현경제팀이 무능하다느니 교체해야 하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현경제팀의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시장에서는 현재 금융시장 불안의 주범인 투신권 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정책당국의 처리방식을 놓고 ‘바가지론’으로 반격하고 있다. 얼마전 강원도 일대에 난 산불도 초기단계에서 몇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충분히 진화할 수 있다. 그 시기를 놓치다 보면 백두대간을 다 태울 만큼 큰 불이 된다는 논리다.마찬가지로 연초에 투신권 구조조정에 대해 신속히 대응했으면 최소한 최근에 나돌고 있는 우리 경제의 위기론은 제기되지 않았다는 시각이다. 그 시기를 놓치다 보니 지금까지 공적자금을 대규모로 투입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우리 경제내에서 제2의 위기론이 거론될 만큼 상황이 악화됐다는 입장이다.이 부문은 중요한 지적이다. 바로 이 부문에서 정책당국의 대처가 잘못됐기 때문에 위기론이 나오는 근본원인이다. 과거 금융위기국들의 위기극복과정을 보면 우리처럼 초기단계에 외화유동성 문제를 해결한 후 경제가 계속해서 안정될 수 있느냐 여부는 시스템 위험의 치유정도에 따라 좌우됐다.문제는 대부분 외환위기 국가들이 유동성 위험을 해결한 후 시스템 위험을 해결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현재 정책당국자처럼 꽃밭론에 취해 정책을 실기할 경우 'IMF 3년차 증후군'이 나타나면서 제2의 경제위기론이 대두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당국자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정책당국자 역시 꽃밭론에 취해 공치사에 여념이 없다면 누가 나서서 남아 있는 위기과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외화유동성 문제 다시 고개 들어문제는 최근 들어 시스템 위기가 제때에 치유되지 않음에 따라 외화유동성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단기외채 비중이 다시 33%대에 진입하고 있다. 물론 절대비율로 볼 때에는 아직도 외환위기를 당할 때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수준이다. 단기외채가 늘어난 배경도 경기회복에 따른 외상수입 대금이 주요인임을 감안하면 일부 시각처럼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이런 시각은 두가지 측면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하나는 현재 외환보유고는 9백억달러다. 일단 외환보유고의 질적인 측면에서 건전성은 고사하고 절대규모로도 부족한 상태다. 6월 이후부터는 외환보유고에 절대규모까지 줄어들고 있다. 최근 단기외채 비중이 33%대에 달하고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이 6백40억달러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대외신용을 안심하고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외환보유고가 최소한 1천억달러 이상은 확보돼야 한다.앞으로 외환보유고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여력도 갈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부분 전망기관들은 내년부터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 내년부터는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차입한 중장기 구제금융의 상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다.다른 하나는 일부 정책당국자의 시각대로 경상수지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본수지흑자로 메울 수 있으면 단기외채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외화유동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시각은 지극히 위험하다.미국과 달리 우리처럼 소규모 개방국가에서는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부문은 경상거래에 국한된다. 외국인투자는 최근처럼 글로벌 투자, 기금(fund)투자가 보편화된 시대에 있어서는 투자환경만 변하면 언제든지 이탈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믿다가는 큰 화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결국 정책당국에서는 우리 경제의 현실을 제대로 읽고 시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우리 경제의 위기론을 불식할 수 있다. 그러려면 외환위기 극복 초기단계에 정책당국자가 보여준 마음가짐(初心)을 가지고 개혁과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도록 국민들로부터 도덕적 합의(moral suasion)를 구해나가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책당국의 책임은 반드시 전제가 돼야 한다.정책수단도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여건을 감안할 때 금리를 시장여건에 맞게 현실화시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정책당국에서는 최근처럼 국제금리가 상승해 대내외 금리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저금리를 고집할 경우 어느 순간에 위기에 대한 우려감이 다시 증폭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