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 스티걸법안 폐지 계기 대형화·복합화 가속 … 메릴린치 등 메이저급 M&A움직임 활발

월가 금융계에 짝짓기 2라운드가 시작됐다. 지난해까지 시티코프와 트래블러스그룹, 뱅크아메리카와 네이션즈뱅크, 독일 도이체방크와 미국 뱅커스 트러스트 등 굵직한 금융기관간의 대형 합병이 잇달은데 이어 올들어 잠잠한 듯 싶었던 월가에 다시 합병 바람이 일고 있다. 지난 7월12일 스위스 최대의 시중은행인 UBS가 미국의 유력 증권회사인 페인웨버사를 1백20억달러에 인수키로 한 것이 그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메릴린치·리먼 브러더스·모건 스탠리 등 대형 은행들과의 합병을 모색해 온 월가 증권회사들의 몸놀림도 빨라지고 있다.메릴린치의 경우는 한때 합병 파트너로 거론됐던 체이스맨해튼을 포함한 몇몇 은행들과의 짝짓기 가능성을 본격 검토하고 있다는 전문이다. 그런가 하면 체이스맨해튼 은행은 시장 분석능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증권회사 모건 스탠리 딘 위터사에 합병을 요청하는 ‘공개 구혼장’을 던져놓은 상태다. 전통적인 시중은행으로서의 이미지를 씻고 투자 은행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체이스측은 “모건스탠리측에서 합병의 조건으로 그룹 회장 자리를 요구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라며 유혹의 손짓을 계속하고 있다.◆ 믿을 건 돈 … 자본 탄탄한 곳으로 헤쳐 모여이 중에서도 UBS의 페인웨버사 인수는 파격적인 거래 대금 등으로 인해 화제의 꼬리를 잇고 있다. UBS가 페인웨버측에 합병을 위해 지급키로 한 대금은 주당 73.5달러. 양측이 합병에 합의한 7월 11일의 페인웨버사 주식 종가를 기준으로 47%의 프리미엄을 얹은 수준이다. 대개의 경우 M&A 대금으로 30% 정도만 되어도 ‘많다’는 소리를 듣는 주가 프리미엄으로 UBS가 47%나 지출키로 한 데 대해 월가 일각에서는 “너무 많이 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두 회사의 상황에 정통한 증권 전문가들은 “UBS로서는 그 정도 값이면 잘 흥정한 셈”이라고 말한다. 페인웨버사의 내재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평가가 깔려 있다.페인웨버사는 연금과 은퇴기금 등 미국내의 주요 저축 상품 운용자들을 적극 공략해 증권시장으로 끌어들이는데 고도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벌어들인 세전 순익이 10억달러를 넘을 정도로 탄탄한 영업력을 자랑한다. UBS는 증권 분야에서 쌓아올린 페인웨버의 이런 마케팅 파워를 끌어안음으로써 국경과 업종을 뛰어넘어 달아오르고 있는 글로벌 금융시장 경쟁에서 전력을 보강하겠다는 계산을 한 셈이다. 페인웨버사도 나름의 계산을 철저히 했음은 물론이다. 온라인 증권산업의 등장 등으로 증권회사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중소 규모 증권사로서의 한계를 느껴온 페인웨버사로서는 나름의 돌파구가 절실했던 시점이었다. 결국 메릴린치, 모건 스탠리, 샐로먼 스미스 바니 등 덩치 큰 증권회사들의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한 승부수로 자본력이 탄탄한 UBS의 우산 밑을 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이런 가운데 최근 월가의 짝짓기 붐과 관련해 심상치 않은 흐름이 돌출했다. ‘월가의 외통수’이기를 고집했던 베어스턴즈 증권사가 “백년대계를 위해서라면 회사를 다른 대형 금융사에 팔 수도 있다”는 폭탄 선언을 다듬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24일 샐로먼 스미스바니 증권의 가이 모슈코프스키 전문위원이 내놓은 보고서가 이같은 사실을 월가에 전파했다. 모슈코프스키 위원은 보고서에서 “베어스턴즈의 최고 경영자인 제임스 케인 사장이 그동안 고수해온 자력갱생의 경영 노선에 일대 수정을 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며 “회사를 다른 회사와 합병시키거나 아예 매각하는 등의 극단적인 대안까지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케인 사장은 이 보고서가 나온 즉시 언론의 문의가 쇄도하자 “세상이 변하고 있다. 다른 금융사와의 합병을 통한 시너지 효과 창출이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못박아 말했다. 자사의 매각 추진설을 시인한 것이다. 케인 사장의 이같은 발언은 뉴욕 증권시장에서 더없는 ‘호재’로 작용했다. 당일 이 회사의 주식에 ‘사자’가 몰리면서 주가가 7%나 뛰어올랐다.월가의 대표적인 이단아로 통해온 베어스턴즈사가 매각이라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뉴스는 월가 금융기관들의 ‘짝짓기’ 붐이 얼마나 절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엿보게 하는 단적인 사례다. 베어스턴즈는 그동안 월가 금융계에서 ‘국외자(outsider)’로 불려왔다. 다른 증권회사들에서 기피 인물로 찍힌 괴짜들을 대거 영입하고는 거액의 연봉을 아끼지 않는 등 ‘튀는’ 행동으로 눈총을 받아왔다.이 회사의 영업 방식은 독특하다. 영업부서의 임직원들에게 거래 체결 등과 관련해 최대한의 자유 재량을 부여하되, ‘탐정(ferret)’으로 불리는 리스크 관리 요원들을 암행 감찰로 투입해 거래 내역을 통제한다. 이 때문에 베어스턴즈사는 월가의 증권회사들 사이에 “리스크 앞에서 너무 몸을 사린다”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베어스턴즈는 ‘구두쇠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이 회사의 전설적 총수인 앨런 그린버그 회장은 틈만 나면 “돈을 버는 최선의 지름길은 절약”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수시로 돌리는 ‘경영 메모’에 언젠가는 “페이퍼 클립의 신규 구입을 그만하고 쓰던 것을 잘 간수해서 재활용하라”는 시시콜콜한 지시까지 늘어놓아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이런 베어스턴즈이지만 최근 영업 과정에서 터져나온 일련의 스캔들로 ‘괴짜지만 괜찮은 증권회사’라는 이미지에 흠집을 입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5월 연방 대배심이 베어스턴즈사로 하여금 캐나다의 한 투자자에게 1억1천1백50만달러라는 거액을 배상토록 판시한 사건이다. 이 투자자는 지난 90년대 중반 베어스턴즈사로부터 잘못된 투자 조언을 받는 바람에 외환 투자를 했다가 3억달러를 날렸다며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었다.베어스턴즈사측은 자사의 ‘책임없음’을 주장하며 즉각 항소했지만 회사 이미지는 이미 구겨진 뒤였다. 회사의 이미지 쇄신도 필요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회사에 ‘결단’을 재촉하고 있는 것은 월가의 경쟁사들간에 M&A(인수·합병) 바람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형화·복합화의 물결을 외면했다가는 영원히 월가의 외톨이로 남을지 모른다는 초조감이 회사 관계자들을 다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보험 영역파괴 … 손잡기 자구책 확산이처럼 월가는 물론 세계 각국의 금융회사들 사이에 얽히고 설키는 합종연횡(合從連衡)의 바람이 뜨거워진 데는 70년 가까이 미국 금융회사들의 영업 범위를 은행·보험·증권 등 영역별로 엄격히 속박해 온 글래스 스티걸법의 폐지가 결정적인 몫을 했다는 지적이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 11일 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여 글래스 스티걸법의 폐지를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이날부터 미국 금융기관들은 서로 은행 및 증권·보험 등의 영역에 자유롭게 진출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금융 슈퍼마켓’을 차릴 수 있게 됐다. 금융회사들이 하나의 계좌로 저축 및 증권 투자, 보험 가입 등 다양한 민원을 소화해줄 수 있는 원스톱 금융 서비스 시대가 공식적인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글래스-스티걸 법안은 지난 33년 대공황 시절 주가 폭락으로 은행들이 연쇄 도산하자 은행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은행과 증권·보험 등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금융 소비자들의 편의를 우선하는 세계적인 추세와 글로벌화의 물결 등으로 글래스-스티걸 법안은 ‘시대에 맞지않는 규제의 화신’으로 낙인찍히게 됐고,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동안 잠잠했던 월가 금융회사간 M&A의 바람이 다시 일기 시작한 것은 이런 흐름에서 비롯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