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부 장기채 유통 수익률 12%선, 간판 주식 수익률 압도 … 안정성 뛰어나 인기 지속될 듯

‘섹시한 주식, 따분한 채권’. 월가의 투자자들은 증권시장의 양대 상품을 이렇게 부른다. 주식은 토끼, 채권은 거북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식의 경우 종목을 잘만 골라서 투자하면 단기간에 몇배씩의 엄청난 수익을 챙길 수 있는 반면, 채권은 수익률이 기껏해야 한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반면 안정성에서는 채권 쪽이 단연 낫다. 주식은 단기간에 큰 폭으로 뛰어오를 수도 있지만, 언제 어떤 상황과 부딪쳐 수직 하강세로 돌아설지 모르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때문에 안정을 중시하는 투자자는 채권, 다소의 리스크를 감안하고서라도 공격적으로 자금을 운영하려는 사람은 주식 투자를 선호한다.그런데 최근 미국 증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거북이가 토끼를 앞질렀다. 올들어 이달 초 현재까지 채권의 유통 수익률이 주요 주식들의 평균 주가 상승률을 웃돌고 있는 것이다. 채권이 수익률에서 주식을 앞선 것은 미 증시가 침체에 빠졌던 지난 1990년 이후 10년만의 일이다. 채권의 ‘주식 격파’ 선봉에 나선 상품은 미 재무부가 발행하는 장기채권. 재무부 장기채는 올들어 지난 3일까지 12%의 유통 수익률을 냈다. 이는 다우 존스 및 나스닥 지수 구성 종목들을 비롯한 미 증시의 간판 주식들을 수익면에서 압도하는 성적이다.나스닥 지수는 인터넷 거품의 폭발과 함께 같은 기간중 상승률이 마이너스 7.6%라는 참담한 성적을 냈고, 다우 존스 공업지수도 6.9% 뒷걸음질쳤다. 미 주식시장에서 우량주들을 가장 많이 포괄하고 있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즈(S&P) 500 지수도 1.1% 하락했다. 반면 채권은 같은 기간 중 비적격 신용등급의 기업들이 발행하는 고금리채권(정크본드) 만이 0.5%의 경미한 하락률을 기록했을 뿐 재무부 장기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상품들이 만만치 않은 수익을 기록했다. 단·장기를 망라한 재무부 채권이 평균 6.7%의 수익률을 낸 것을 비롯, 지방정부 채권과 공공기관들이 발행한 채권들도 각각 5.9%와 4.6%의 수익률을 안겨줬다. 회사채 평균 수익률도 4.1%를 기록했다. 채권 투자자들에게 보다 짭짤한 벌이를 안겨준 상품은 개도국 채권에 전문적으로 투자를 대행하는 미국 증권회사들의 이머징 마켓 채권 펀드. 이들 상품은 재무부 장기채를 웃도는 12%의 수익 실적을 냈다.◆ 정부채권 물량 줄어 채권값 오른다 분석도이처럼 수익률 경주에서 ‘거북이’ 채권이 ‘토끼’ 주식을 앞지르게 된 까닭에 대해 월가 전문가들은 몇가지 설명을 내놓고 있다. 우선 간판 채권 상품인 재무부 장기채 등 정부채권의 물량이 예전에 비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희소성의 원리에 입각, 채권값이 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 재무부는 만성적인 적자 상태를 면치 못했던 연방 재정수지가 최근 엄청난 흑자로 반전됨에 따라 국채 발행 물량을 대폭 축소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연방 예산이 흑자로 돌아선 마당에 굳이 이자를 물어가면서까지 국채를 대거 발행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통화 당국이 최근 연이어 단행해 온 기준 금리 인상 조치에 종지부를 찍고 당분간 현 금리 수준을 유지키로 했다는 금융가의 관측도 채권값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더구나 일부 채권의 경우 웬만한 주식을 뺨칠 만큼 큰 폭의 상승과 하락을 거듭하는 장세가 펼쳐지고 있어 “채권은 따분하다”는 전통적인 인식마저 불식되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것이 30년만기 재무부 채권이다. 이 장기채는 미국 경기의 인플레 우려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큰 폭으로 뚝 떨어졌다가는, 연방 재정흑자가 불어나고 있다는 보도만 나오면 상승세로 반전하는 등 오르락 내리락 춤을 추고 있다. 덕분에 투자자들이 주식에 못지 않은 ‘스릴’을 느끼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30년만기 재무부 채권은 지난 1일 미국 경제가 과열 우려를 씻고 연착륙의 청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뉴스에 힘입어 하루 동안 1%나 올랐다. 액면가 1천달러짜리 채권값이 하루새 10달러 상승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튿날 1% 가량이 도로 하락했다. 재무부가 막대한 재정흑자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국채 발행을 계속키로 했다는 보도에 실망 매물이 쏟아져나온 탓이다.이렇듯 채권 시장이 주식 쪽에 못지 않은 스릴과 수익률을 안겨주게 되면서 일반 투자자들 사이에 채권 붐이 일고 있다. 그러나 증권 시황에 정통하지 않은 일반인들의 뒤늦은 채권 시장 합류는 자칫 ‘상투’를 잡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이미 채권 시세가 시중의 호재를 충분히 반영한 상태여서 더 이상 큰 폭의 추가적인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채권과 주식의 수익률 실적을 올해만이 아닌 과거 몇 년간으로 기준을 넓혀서 비교할 경우 ‘주식 우위’가 확연하게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다우 존스와 나스닥 등 주요 주가지수는 95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연속 두자릿수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올해 채권 시장이 조금 반짝이고 있다지만, 작년까지 주식 시장이 보인 이런 위력에 비하면 그야말로 왜소한 실적에 불과한 셈이다. 또 다른 예로 지난 10년 동안 S&P 500 주가지수가 연 평균 17.6%의 상승을 보인데 비해 채권들의 연평균 상승률은 7.8%에 머물렀다.◆ 주식 투자 권고 불구, 채권쪽으로 몰려이런 사실 등을 들어 일부 전문가들은 일반 투자자들에게 여전히 주식 쪽에 치중할 것을 권고하기도 한다. 인터넷 거품이 터질만큼 터지는 등 증시 주변에 드리워져 있던 악재들이 상당 부분 해소된 만큼 올 가을 이후에는 주식 시장이 본격적인 반등을 시도할 것이라는 근거에서다.하지만 이런 권고에도 불구하고 채권 쪽으로 옮겨가는 일반 투자자들의 발길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중견 증권회사 에드워드 존스사의 경우 나스닥의 주가가 절정을 치달았던 지난 3월초에는 새로 들어온 투자 자금의 75% 이상이 주식 시장으로 몰린 반면 채권쪽으로 들어간 돈은 25%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즘은 채권 시장에 편입되는 자금 비중이 40%를 넘는다. 이중에서도 일반인들은 향후 상승 여력이 큰 것으로 분석되는 회사채 쪽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특히 신용등급을 적격으로 판정받은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는 쏟아지는 매수 주문에 의해 최근 5년래 최고 수준으로 값이 치솟은 상태다. 인터넷 혁명에 대한 전문가들의 갖가지 달콤한 말에 매혹돼 나스닥 시장에 몰려들었다가 된통 혼쭐난 투자자들이 ‘리스크 관리’에 새롭게 눈 뜬 결과다.주식 시장 활황기 때 보유 주식을 재빨리 처분해 큰 돈을 번 투자자들도 ‘재산의 안전한 관리’라는 차원에서 채권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실제로 실리콘 밸리 지역의 첨단 기업 임직원들은 스톡 옵션을 행사해 벌어들인 돈을 대거 채권 쪽에 잠가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때문에 실리콘 밸리내 증권회사들에서는 고객 예탁금의 포트폴리오 중에서 채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지역에 비해 부쩍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상당수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당분간 채권 시장의 인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재무부 채권이나 회사채의 경우 주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정성이 뛰어나면서 수익률도 은행의 저축 금리보다 훨씬 높은 6~8%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채 등에 비해 안정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수익률이 높은 개도국 채권 펀드도 인기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채권팀 같은 경우는 이머징 마켓 채권의 투자 수익률이 올해 전체적으로 19%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주식 시장의 부진을 타고 대도약의 나래를 펴고 있는 채권 시장의 승승장구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을 열광적으로 사로잡았던 주식 시장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반면, 굼벵이 취급을 받았던 채권 시장이 투자자들의 신데렐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정상에 있을 때 내려갈 일을 생각하라는 옛 선현의 가르침은 증시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절감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