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기술 개발·엄격한 품질 관리, 대형 거래처 납품·대량 수출로 급성장 … 동인·시즈 등

‘굴뚝산업 약진 앞으로’.지난해와 올해 닷컴기업의 붐에 밀려 조명을 받지 못한 제조업체들이 최근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올해 초 닷컴기업들이 돈풍년속에 방방 뜰 때도 전통 제조업체들은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외길경영에 나서 회사의 가치를 키워냈다.최근 닷컴붐이 한풀 꺾이면서 이들의 약진은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실제 올 상반기 무역수지 흑자에 기여했던 업종은 섬유, 자동차, 조선, 정보기기 등 전통제조업체들이다.경기도 안성 시화공단내에는 전통제조업에 매달려 성공스토리를 엮어냈거나 신화창조에 나서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이곳은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공단내 중소기업자동화센터 주변이나 노동복지회관 쪽에는 공장이 드문드문 들어서 황량한 느낌을 주었던 곳이다. 더구나 이곳은 지난 97년 말부터 기아자동차 협력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서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그러나 올해 초부터 이곳 시화공단에 새로운 공장이 속속 입주하기 시작했다. 노동복지회관쪽에는 아예 동서남북을 가르는 6차선 도로가 났고, 크고 작은 제조업체들이 입주해 공장을 설립하고 기계를 들여오는 등 생기가 넘쳐나고 있다.◆ 동인, 잡음없이 12년간 공동 운영지난해 시화공단으로 이사해 319번지에 자리잡은 동인엔지니어링은 시화공단내에서 굴뚝 외길경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업체에 속한다. 지난 88년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조그마한 유통상가에서 10평짜리 프레스 금형 공장을 세운 것이 이 회사의 시발점. 한때 자동화 기계의 바람이 불어 동인도 프레스 금형보다는 자동화 기계 제작에 전념했었다.그러나 자동화 바람은 대기업들에만 해당사항이었지 조그마한 중소업체까지 그 혜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기계는 들여왔지만 거래처를 찾을 수 없자 애초 자신 있던 프레스 금형에 주력하기로 방향을 돌렸다.이 회사는 김인식(42)씨와 서동일(46)씨가 공동 창업했고 지금까지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윤 분배 문제로 동업관계가 깨지는 사례가 빈번한데도 이곳은 사이 좋게 12년간 공동 운영해왔다. 김사장과 서사장은 성동기계공고 선후배 사이. 두 사람은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70년대 말엔 이처럼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힘들게 공부했지만 서사장과 김사장은 나란히 서울지방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이후 서사장은 중앙대 기계공학과에 김사장은 건국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대학에 가서도 김사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낮엔 전자레인지 부품을 제작하는 동진정밀에서 일하고 공부는 밤에 해야 했다. 이곳에서 그는 프레스 자동화 로봇을 개발하는 팀장까지 올라갔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엔지니어였다. 서사장도 대학 졸업 후 신도리코에 입사, 기술연구소와 해외수출부를 두루 거치면서 영업방면의 능력도 키웠다.◆ ‘품질 하나만은 제대로’ 고평가받아그러나 뭔가 뜻있는 일을 해보자는 김사장의 제안에 서사장이 맞장구를 치면서 둘은 다시 파트너가 될 결심을 했다.“그때 우린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젊음 하나만으로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동안 우리가 겪은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창업한 거죠.”(김인식 사장)프레스 금형쪽엔 둘 다 자신이 있었고 시장 수요도 있다고 판단했다. 주문이 밀려드는 때엔 며칠씩 밤새는 것은 예사였다. 품질, 납기, 가격 등 세 가지 분야에서 경쟁업체들보다 좀더 좋은 평가를 받는데 애쓴 결과 거래처의 수요는 줄지 않았다. 이윤이 적어지더라도 품질 하나만큼은 ‘제대로’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두 사람의 목표였다.지난 96년 말부터는 금형기계 공급뿐 아니라 금형을 통해 제작되는 부품을 생산하는 등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성실한 기업으로 알려진 덕분에 모터를 생산하는 모아텍에 97년초부터 CD-ROM 드라이브와 DVD에 들어가는 모터의 부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모아텍은 모터생산 분야에서 세계 시장 2위를 차지하는 업체로 연간 6천만개의 모터를 생산하고 있다. 모아텍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동인의 매출도 늘었다. 지난해 동인의 매출액은 25억원이었고 올해 40억원이 될 전망이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모터 부품을 월 4백만개에서 7백만개까지 늘리면 내년 매출은 두배가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경부고속도로가 남북을 잇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삼성자동차 물류센터와 포스코 기술연구소, 이동통신 부품 제조업체인 케이엠더블유 등이 자리잡고 있다.이곳에도 닷컴붐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히 ‘굴뚝산업 신화창조’에 도전장을 낸 기업들이 상당수 입주해 있다.삼진기연은 이곳에서 지난 13년 동안 탄탄하게 성장해온 정밀 금형업체다. 이 회사는 창투사들이 몸을 사리고 있던 지난 3월과 6월 총 90억원의 투자자금을 받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투자받을 때 액면가의 20배에 달하는 좋은 조건이었다.삼진은 지난 87년 설립된 이후 일본으로 정밀 성형부품을 수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88년엔 삼성항공과 일본 미놀타에 카메라 부품을 납품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삼성전자에 비디오카메라 부품, LG전자에 컴퓨터부품을 공급했다. 주로 삼성전자, 삼성전기, 일본 미놀타, LG전자 등 대기업에 납품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매출실적을 보면 97년 73억원, 98년 93억원 그리고 지난해 1백50억원으로 해마다 증가됐다. 올해도 지난 8월까지 이미 1백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굴뚝외길을 걸어 급성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이처럼 탄탄한 성장세를 타게 된데는 정밀 금형기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립초기 카메라 부품 제작에서 오디오와 비디오 데크, 가스성형 사출기까지 제작할 수 있는 금형 기술을 축적했다. 정밀 금형 설계, 자동차 관련 부품 기술 등 기반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97년 100PPM과 ISO9001 인증을 받았다. 중국 광동성엔 지난 96년 현지법인을 설립, 매월 1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3월부터 개발에 들어간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의 백라이트유닛(Back Light Unit)용 프레임의 개발에 성공, 11월부터 상용화돼 매출신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일본 차타니산업과 제휴해 개발한 백라이트유닛이란 액정화면의 뒤에서 빛을 쏴주는 부품을 말한다. 형광램프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를 균일한 평면광으로 만들어주는 이 부품은 현재 80%를 수입에 의존할 정도로 국산화가 늦었다. 이 회사 정석제 이사는 “이 부품을 양산하는 11월 이후 매출이 증가할 것으로 보고 올해 매출목표를 2백억원으로 정했다. 내년엔 두배가 넘는 4백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창투사들도 삼진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성장성을 예견해 투자에 나섰다. 지난 3월 아리랑구조조정기금에서 액면가의 17배의 좋은 조건으로 70억원을 유치했다. 이어 6월엔 일본 스미토모상사와 한국지사가 10억원을, 국내 산은캐피털, 기은캐피털이 각각 4억원을 출자했다. 이 업체들은 액면가의 20배로 투자했다.경기도 성남에 있는 시즈는 스키장갑 하나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제조업체다. 전세계 스키장에서 장갑을 끼고 있는 사람들 중 다섯명의 하나는 시즈에서 생산하는 장갑을 끼고 있을 정도. 세계에서 유통되는 1천만 켤레의 스키장갑중 시즈 제품이 2백20만 켤레다.세계 3대 스키장갑 제조업체인 대만의 팔레스사와 캐나다 아틀래스사는 아직 시즈의 기록을 깨지 못했다. 이런 기록적인 매출세로 시즈는 무역의 날이나 수출의 날이면 어김없이 정부로부터 수출상을 받았다. 올해는 2백10억원 매출에 4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현재 30개국 70개 업체에 수출하고 있다.시즈는 지난 70년 가발수출로 시작한 중소기업이었다. 초기엔 가발 수출의 호조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지만 70년대 중반 수요 급감으로 이 분야의 사업을 접었다.이후 우연한 기회에 스키장갑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지난 76년 이 분야를 주력으로 사업의 방향을 바꾸었다. 목표는 세계에서 최고로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당시 가발을 제조할 때 사용하던 재봉틀과 기능직원을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스키장갑을 선정했으나, 초기 미국에 수출했던 3만켤레의 스키장갑이 원자재 사용의 잘못으로 전부 클레임을 당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시즈, 스키장갑 하나로 세계 시장 석권그러나 최고급 원단을 사용해 철저한 품질 검사를 마친 뒤 독일시장을 개척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철저한 바이어 관리와 엄격한 품질관리 제도를 도입했고, 패션 분야에도 투자를 많이 해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시즈는 현재 스키장갑 브랜드 1백개중 60개의 브랜드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장갑을 공급하고 있다. 지난 90년 초에는 중국과 스리랑카에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최근엔 자체 브랜드 ‘루디스’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삼성경제연구소 김근동 연구원은 “시즈는 지성이면 감천이라 할 정도로 해외 바이어를 하늘처럼 모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만족시켜 장기 거래에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인터뷰 / 동인엔지니어링 서동일 사장·김인식 사장제대로 된 제품 만들면 ‘굴뚝에도 연기 솔솔’동인엔지니어링 서동일 사장과 김인식 사장이 내놓는 최대의 자랑거리는 “설립이후 12년 동안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잘리는 등 외상을 입은 직원은 제조업체 공장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이곳만큼은 한 명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는 것이 꿈이지만 직원들의 안전도에서도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다.▶ 디지털 혁명의 변화를 따라가야 하지 않나.언론을 통해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지만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납품하는 업체들끼리 아직 이 분야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 e-비즈니스 도입이 매출증대에 그다지 기여할 것 같지 않아서다.▶ 거래처 관리가 좋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김사장) 우린 하청업체와 모업체,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우리와 상대하고 있는 업체들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대한다. 고객의 입장에서 무엇을 원할까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거래처 관리가 된다.(서사장) 제품에 결함이 발견되면 우리가 자진해서 수거하고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었다. 얼마전엔 중국 현지공장으로 선적된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뒤늦게 발견하고 새 제품을 항공편으로 실어보낸 적도 있었다. 물론 우리가 전액 보상하고 항공비도 지불했다. 신뢰는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경영하기에 어려운 점은 없는가.우린 개발에만 주력하고 세금, 회계는 세무사에 일임하고 있다. 아직은 직원 18명의 조그마한 업체여서 경영에 어려운 점은 없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물건을 구입했으면 현금으로 지불하고,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하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