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건설업계는 ‘비만아’를 ‘우량아’로 오인해 왔습니다. ‘업계 1위’는 곧 ‘위험도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집만 크고 체력은 바닥인 업체들이 패권을 다퉜지요.”(S건설 임직원)“국내외 건설현장에서 번 돈을 본업인 ‘건설’에 투자한 업체는 거의 없었습니다.”(해외건설협회 관계자)사상 초유의 건설업 위기를 두고 업계 전문가들은 ‘올 것이 왔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큼 우리나라 건설업은 전근대적인 구조였다는 이야기다. 침몰 직전까지 갔다 위기를 간신히 넘긴 현대건설이나 몰락한 ‘뚝심의 전통 건설사’ 동아건설, 종이 호랑이가 돼 버린 대우건설의 성장 배경이 이를 잘 말해준다.건설업계 ‘빅3’로 통하던 이 업체들의 공통점은 재벌그룹의 모회사로, 계열사를 일구는 자금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취약한 재무구조, 낮은 생산성을 극복하지 못해 ‘건설로 번 돈 몽땅 퍼주고 쪽박 찼다’는 비아냥을 듣기에 이르렀다.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건설업계의 ‘간판스타’ 현대건설의 경우 ‘큰 덩치’가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1947년 창립, 한국 경제발전 역사와 맥을 같이해 온 현대건설은 61년 이후 시공능력평가 1위를 고수해 왔다. 한때 해외수주액 세계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건설사업은 방대한 규모에 비해 수익이 낮은 악순환이 계속됐고 점차 미국 벡텔사와 같은 기술 지향 기업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국내외 건설업 환경 변화도 위기 불러IMF위기에도 회사 규모를 줄이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화근으로 꼽힌다. 현대건설은 최근 1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마련, 회생의 길로 들어섰지만 몇 달간 겪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는 대내외 신인도를 크게 추락시켰다. 당분간 신규사업 수주는 힘들 것이란게 업계의 시각이다.건설사 자체 문제뿐 아니라 국내외 건설업 환경 변화도 위기의 근원으로 꼽힌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물량 감소. 70년대 중동 건설 특수, 80~90년대 대형 국책사업 및 주택 2백만호 건설 특수가 지나간 후엔 마땅한 호재가 없는 상황이 지속됐다. 국내 건설 수주액은 97년 80조원에서 올해 43조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다.여기에 IMF위기 이후 대외 신인도 하락으로 해외 수주 물량이 급감한 것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97년 1백40억달러를 기록하던 해외건설 수주액은 올 10월말 현재 38억달러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나마 현대건설이 총 수주액의 57%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를 대우, 삼성물산 등이 나눠 가진 형국이다. 해외건설 수주액 10위권에 속하는 동아건설, 신화건설의 퇴출까지 겹쳐 앞으로의 사정은 더욱 어렵게 됐다. 메이저업체들의 신인도 하락이 가져온 해외시장에서의 ‘왕따’ 극복이 무엇보다 큰 과제라는 지적이다.아이러니컬한 것은 건설 물량이 대폭 줄어든 반면 건설업체 수는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는 것. 97년 2만4천개였던 건설업체는 올해 3만1천6백개로 늘어난 상태다. 지난해 건설업체 설립제도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완화되면서 비롯된 현상이다. 공사 실적도 없는 무자격 페이퍼 컴퍼니가 입찰장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 요즘 건설시장의 모습이다. 전체 건설수주액의 85%를 차지하는 10억원 미만의 소규모 공사는 적격심사시 실적평가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페이퍼 컴퍼니들의 ‘밥’이나 다름없다. 한명의 ‘입찰꾼’이 수십개 건설회사 입찰서류를 들고 다니면서 입찰을 하고, 운좋게 수주를 하면 다른 회사에 수수료를 받고 팔아넘기는 웃지 못할 풍경도 벌어지고 있다.업계 판도변화 조짐 ‘모락모락’건설교통부는 내년까지 2천5백개 부실건설업체를 가려내 퇴출시킨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근본적으로 재무구조, 기술능력을 회사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건설산업 위기탈출비상대책반’을 구성한 대한건설협회 남동익 상근부회장은 “97년 1개 회사당 1백92억원이었던 평균 수주금액이 올해는 81억원으로 줄었다”면서 “건설업 등록요건을 강화하고 적격심사시 실적평가 제외 대상을 10억원 미만에서 5억원 미만 공사로 축소하는 등 강도높은 구조조정으로 시장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국내 건설시장에서 가장 눈여겨 볼 것은 업계 판도변화 조짐이 서서히 일고 있다는 점이다. 건설시장 전체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는 반응도 있지만 그 변화의 싹은 지금 강하게 움트고 있다. 마치 엄동설한에 꽁꽁 언 대지를 뚫고 꼿꼿이 머리를 내미는 보리와 같다. 현대-동아-대우의 시대가 가고 ‘신 강자’가 등장한다는게 변화의 핵심이다. 삼성물산, 대림산업, 현대산업개발, LG건설이 대표적인 후보 기업으로 꼽힌다. 이들 업체는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수익성 위주 사업을 전개, 외형보다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최근 증권가에서는 이들 기업이 ‘11·3 퇴출로 긍정적 영향을 얻을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신흥증권은 11월6일자 일간보고서에서 ‘동아건설 신화건설 삼익건설 청구 우방 등의 퇴출로 경쟁업체인 LG건설 대림산업 현대산업개발 태영 동부건설 등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고 밝혔다.건설업체의 사업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을 전망이다. 이미 상당수의 대형 건설사들이 시공 중심에서 선진국형 건설관리(CM·Construction Management)회사로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 기획 설계 발주 시공 감리 유지관리 등 건설사업의 라이프 사이클을 분리, 각 분야를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키우는 전략이다. 이에따라 중소 건설업체와 대형업체의 합작, 아웃소싱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내년 개장될 리츠(REITs)시장이 기업의 자산 유동성 확보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높다. 한국건설경제인협의회는 ‘부동산투자회사가 개발사업에 참여하게 되면 7조~9조원에 이르는 신규 건설수요가 발생하고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활용도 높아져 사업 진행에 한결 숨통이 트일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을 내놓았다. 어느 업체가 먼저 사업구조를 선진화하는가에 따라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표현되는 요즘 건설시장의 패권 향방이 가려지는 셈이다. 지금 국내 건설시장에서는 ‘위기뒤 기회’라는 평범한 말을 반영이라도 하듯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패권전쟁이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