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4일 오후 5시. 지하철 2호선 선릉역 8번 출구. 해가 떨어지자 제법 바람이 차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친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에 포장마차가 여기저기 문을 열고 근처 ‘벤처맨’들이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3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는 김수행(가명·38)씨는 “작년하고 많이 틀려요. 앞건물과 뒷건물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간식을 사 갔는데, 요즘은 통 내려오질 않아요. 그래서 한번은 건물관리인에게 물었죠. 지난달에 방을 뺏다고 하더군요.” 벤처 위기가 주변까지 미친 여파다.벤처붐과 함께 호황을 누렸던 술집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선릉역과 삼성역 사이에 위치한 모 룸살롱에 다녀왔다는 A벤처 홍보팀장은 이렇게 전했다. “술접대가 많아 한 달에 한번 이상 룸살롱을 갑니다. 몇 달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벤처기업인 같이 보이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없더라구요.” 그는 강남의 부유층이 여전히 주요 고객이지만 벤처기업인들이 떠난 자리는 허전하다는 술집 주인의 말까지 덧붙였다.강남지역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곳 테헤란밸리는 지하철 2호선 서초역에서 교대 강남 역삼 선릉 삼성역에 이르는 약 10Km, 넓이 40m의 도로다. 98년초부터 소프트웨어 이동통신 네트워크 등 정보통신 관련업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테헤란밸리가 벤처의 총본산이자 성지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말부터는 닷컴 기업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인터넷 벤처의 요람이 됐다.현재 테헤란밸리에는 줄잡아 5백개 이상의 벤처기업이 있다. 벤처빌딩의 꺼지지 않는 불빛과 이들을 유혹하는 단란주점 룸살롱의 흥청거리는 불빛. 이런 저런 불빛을 지고 살아가는 테헤란밸리 사람들. 이들의 요즘 심정은 예년과 다르다. 연봉 수천만원에 스톡옵션, 고급 승용차는 옛말이 됐다. 지금은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이냐는 것이 주요 관심사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너도나도 돈가뭄 … 투자유치 말도 못꺼낼 판대치동의 한 빌딩 지하에 둥지를 튼 인터넷 경품 사이트 기찬닷컴은 지난 몇 달 동안 악몽과 같은 날을 보냈다. 비즈니스 모델을 인정받아 올초에 펀딩까지 받고, 매출도 발생하고 있는데, 추가 펀딩이 안된 것이다.“창투사 30군데에 전화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중 30%는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더군요. 나머지는 인터넷이니까 안된다, 요즘 펀딩받기 힘들다는 말만 합니다. 저희들은 매출이 있는데도 모두 고개를 돌려요.” 기찬닷컴 임민택(31) 사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타 들어간다. 임사장은 해외로 눈을 돌려 홍콩 대만 등으로부터 2백만달러의 자금을 유치해 한숨 돌렸다.수익모델이 있는 곳도 이 정도니 수익모델이 없거나 만들어야 하는 곳은 살얼음을 딛고 있는 형편이다. 살얼음 위를 걷다 침몰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도 요즘 테헤란밸리의 모습이다. 올초 e코퍼레이션과 팍스넷이 공동출자해 설립한 이브래인뱅크닷컴은 현재 M&A 시장에 나와 있다. 테헤란밸리 밑바닥 소식을 전달하며 눈길을 끌었던 주간지 싸이버저널도 휴간했다.위기는 바로 감원으로 이어졌다. 인원감축은 이제 테헤란밸리의 일상이 될 정도다. 투자 정보, 유통 정보를 제공하던 디지털FK는 52명이었던 직원을 최근 18명으로 줄였다. 인터넷 음반판매 업체인 메타랜드는 직원 90명 중 40명을 감원했다. 비용절감은 기본이다. 인터넷 채팅 사이트인 하늘사랑은 사무실 임대료를 줄이기 위해 마케팅 홍보인력이 상주하던 강남사옥을 폐쇄하고 대방동 사옥으로 합쳤다. 커뮤니티 사이트인 네띠앙은 직원들의 휴가비용을 종전 2백만원에서 1백만원으로 줄였다. 이처럼 벤처들이 테헤란밸리를 떠나거나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치자 벤처 붐으로 호황을 누렸던 IDC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닷컴 벤처들이 가장 많이 입주한 논현동 KIDC에는 요즘 ‘방’을 빼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체 입주업체(9백개) 가운데 5%가 빠져나갔습니다. 미수고객도 늘어나고 있어 걱정입니다.” 김진석(42) 센터장의 한숨 섞인 말이다.얼어붙은 테헤란밸리에 자금을 수혈해야하는 창투사도 썰렁하다. 무역센터에 위치한 다산벤처투자는 인터넷 투자는 아예 접은 상태다. 다산벤처의 서창수(43) 부사장은 “하루에도 30건 정도의 사업계획서가 온다”며 “지난해 같으면 펀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테헤란밸리에 봄은 오는가하지만 추운 겨울 뒤엔 따뜻한 봄이 오듯 테헤란밸리의 아침은 여전히 희망차다. 테헤란밸리 끝자락에 위치한 현대오픽스 오피스텔의 이랭크닷컴 직원 5명은 요즘도 3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창업멤버인 정길남(33)씨는 운영자금이 그리 넉넉하진 않지만 내년 초까진 버틸 수 있단다. “지금 펀딩 받아 봐야 3배수 이상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헐값에 그동안의 노력을 팔 수는 없습니다.” 정씨의 각오다. 최근 골드만삭스 등으로부터 펀딩 받은 배움닷컴은 허리띠 대신 머리띠를 둘러맸다. 정신을 다시 차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출근 시간을 앞당기고 퇴근시간을 더 늦췄다. “벤처하면 밤샘하고 다음날 늦게 출근하는 것이 당연했죠. 하지만 이제 이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벤처도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임춘수(36) 사장의 말이다.테헤란밸리 벤처들을 목조이는 것은 자금난이다. 그래서 새로운 수익모델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포스코센터 맞은편에 위치한 온라인 게임업체 CCR 박주용(34) 홍보팀장은 그동안 무료로 운영해오던 온라인 게임 ‘포트리스’ 유료화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회원수가 6백만명이 넘었지만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 않을 땐 운영자금만도 부담이 되고 있어서다. “일반 사용자가 아닌 PC방을 대상으로 유료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무료라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어 어렵습니다. 지금 와서 유료화한다고 하면 어떤 잡음이 생길지 우려가 되긴 합니다.” 박팀장은 어쨌든 유료화 아니면 살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테헤란밸리의 희망은 자금유치에 성공하는 벤처들이 속속 나오면서 더 밝다. 온라인 게임업체 아스트로네스트는 10월 중순 미국 인큐베이팅업체인 브래인러시로부터 1백만달러를 유치했다. 플랜트 기자재 전문 B2B 전자상거래 업체인 엑스메트릭스는 10억원의 자금을 제3자 신주배정방식으로 펀딩받았다. 이외에도 하이칩스, 디엠에스, 보이소반도체, 큰사람컴퓨터, 기가텔레콤 등이 자금을 유치했다. 테헤란밸리 벤처는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테헤란밸리 취재를 마칠 무렵 인터넷 컨설팅업체 인터젠 박용찬(40) 사장은 의미 있는 얘기를 했다. “닷컴기업의 몰락을 e-비즈니스 전체의 몰락으로 보면 안됩니다. 닷컴기업은 e-비즈니스의 인에이블러(개척자)입니다.” 벤처 위기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사라지고 태어나고 하는 과정을 통해 벤처 산업의 체질이 보다 강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