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안 뢰처 지음/박진희 옮김/생각의 나무/369쪽/2000년/1만5천원

인터넷이라는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품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몰고 왔는가, 또는 몰고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질려 버릴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반복돼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지한 논의’는 생각보다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거대 기계 지식 designtimesp=20534>은 이런 관점에서 희소가치가 있는 책이다. ‘21세기를 지배할 새로운 질서’라는 거시적 시각 아래서 인터넷의 가능성을 탐색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이 책의 대표 저자인 플로리안 뢰처도, 흔한 방법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전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다양한 움직임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확장되는 사이버 공간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이 가상 공간이 실제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놓고 있는지 정리하는 것이다.원격 조정을 가능하게 한 디지털 혁명은 주인을 알아보는 지능형 주택이나 로봇 고양이, 생각을 할 줄 아는 기계들을 등장시켰다. 한편 공공의 장이 인터넷으로 인해 확대되면서 가상 민주주의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NGO들은 웹상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행동을 조직화한다. 인터넷 공간의 사이버 시위가 강력한 정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또한 인터넷은 전지구를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과 같은 보수적인 이슬람국가에도 인터넷 카페가 생겼다. 거대한 나라 중국에서도 인터넷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컴퓨터 범죄가 문제로 떠올랐으며, 당국은 가상공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세력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청소년을 음란물과 검증되지 않은 쓰레기 정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검열 방법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저자가 이같은 다양한 측면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거대 기계 지식’에 대한 논의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그는 인터넷이야말로 전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거대 지식 보고를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파가 못다 이룬 꿈의 실현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본다.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뢰처의 글 다음에는 토론토 대학 의학연구소 교수인 찰스 렘스덴, 필리핀 녹색당 의장 로베르토 베르졸라, 프랑스 문화부 과학 자문위원이자 정보통신 과학자인 필립 퀴오, NGO활동가인 스테판 레이 등 다양한 면면의 인물들이 쓴 짧은 논문들이 실려 있다. 유전공학, 사이보그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결합이 진행되어가고 있다는 관점에서 기술의 발전을 인류의 진화단계로 이해하는 럼스덴, 인터넷으로 인해 제 3세계와 동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추적한 베르졸라 등 짧으나마 다채로운 관심사들을 엿볼 수 있다. 번역자의 표현대로 이 책은 ‘생활 세계 인터넷의 종합적인 고찰서’ 인 동시에 인류 공동의 재산인 인터넷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지, 그 가능성을 저울질해보는 시도이다.이 책은 ‘21세기를 위한 비전’시리즈 중 한 권으로 나왔다. 이 시리즈는 하노버 엑스포2000 사업과 연계해 기획된 것이다. 경제 중심의 패러다임, 경쟁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넘어 문명과 인간, 생태를 아우르는 21세기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자는 의지를 천명하는 하노버 엑스포 정신이 이 책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기에 담긴 주장들을 이해하기가 조금은 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