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영화계에서 라스 폰 트리에라는 이름은 항상 놀라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1년 <유로파 designtimesp=20698>를 시작으로 파격적인 형식을 선보인 그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designtimesp=20699>, <백치들 designtimesp=20700> 등의 영화로 세계 각지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석권, 명실공히 20세기 말 가장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떠올랐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괴벽이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임신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고, 광장 공포증 환자라 영화제 참석을 기피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이런 그가 작년 새로운 영화 <어둠 속의 댄서 designtimesp=20703>를 들고 칸 영화제를 찾았을 때, 칸은 그에게 최고상인 황금 종려상을 선사했다.셀마(비요크)는 미국 워싱턴 작은 마을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아들과 함께 사는 평범한 여성. 그러나 그녀에게는 절친한 친구 캐시(카트린 드뇌브)에게도 말못할 비밀이 하나 있다. 시력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으며 아들 진 역시 그렇다는 사실. 그녀는 자신은 아랑곳 않고 진의 수술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 돈을 모은다. 2천달러가 넘는 수술비가 거의 모였을 때, 셀마의 집주인인 빌(데이빗 모스)은 아내의 허영으로 인한 빚을 갚지 못해 고민하던 중 이 돈을 훔친다.줄거리만 볼 때 이 영화는 모성의 멜로 드라마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라스 폰 트리에는 이 단순한 최루성 드라마를 뮤지컬이라는 엉뚱한 방식으로 펼쳐 나간다.알려진 대로 뮤지컬은 노래와 춤을 통해 현실을 잊게 하는 환각을 제공하는 장르다. 하지만 <어둠 속의 댄서 designtimesp=20710>는 반대로 셀마가 쓰디쓴 현실에 맞닥뜨릴 때 그 처절한 고통의 순간을 뮤지컬 신에 담아 내고 있다. 덕분에 으레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에서 갑작스러운 노래와 춤이 등장할 때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꼬집고 있다. 인생에서 정말 처절한 지점은 눈물 몇 방울이나 손수건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의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몇 해 전 동료 감독들과 함께 인위적인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소위 ‘도그마 95’ 강령을 내세워 세계 영화계에 파문을 던지기도 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 designtimesp=20713>에서 스스로의 법칙을 깨뜨려 버린다. 이 강령에는 ‘음악을 쓰지 않는다, 특수 효과를 사용하지 않는다’ 등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뮤지컬 장면의 완성도를 위해 무려 1백대의 카메라를 설치했으며, 사운드 후반 작업에만 6개월을 썼다. 그러나 영화 형식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와 인간 정서의 심연을 끌어내는 솜씨만은 전혀 퇴색되지 않은 느낌이다. 오래된 파트너인 명 촬영감독 로비 뮐러(그는 빔 벤더스의 파트너로도 유명하다)의 광기 어린 카메라 역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도 아일랜드의 국민 가수 비요크의 신들린 연기와 노래는 영화의 정점이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올해 오스카 후보에도 오른 그녀는 마치 셀마를 위해 태어난 듯 절대 몰입의 경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