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이후 세계 증시의 동반 하락, 파키스탄 터키 아르헨티나 러시아의 구제금융 신청, 터키의 금융불안 재연, 일본을 비롯한 잇따른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으로 국제금융환경이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일부에서는 1991∼92년 초 유럽 통화 위기, 94∼95년 초 멕시코 페소화 위기, 97∼98년 초 아시아 통화 위기에 이어 ‘국제금융 위기의 3년 주기설’이 가시화되는게 아니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실제로 경제성장률, 경상수지와 같은 거시경제변수로 위기 가능성을 알아보는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위기판단지표나 은행의 부실화 정도, 기업 재무위험도와 같은 미시경제변수로 위기 가능성을 미리 점검해 보는 조기경보지수를 산출해 보더라도 세계 각국들의 금융위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최근 들어 세계자금 흐름도 빠르게 투기화, 단기화되고 있다. 이미 헤지펀드의 원금규모는 4천억달러 정도로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 이전수준을 회복한 상태다. 투자자금도 갈수록 고수익 고위험 자산에 몰리고 있어 질적인 측면도 악화되고 있다.금융위기 3년 주기설 가시화 우려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들의 위기대처 능력은 어떠한가. 우선 개별국가 차원에서 지난해부터 국제수지 불균형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각국의 외환보유 능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터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일부 개도국들의 외환보유고는 거의 바닥이 난 상태다.제2선 자금(Back-up Facility)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인접국가간의 협조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의 추가 재원확보 문제도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 오히려 부시 정부 출범 이후 국제관계에 있어 각국의 경제실리 추구가 중시되는 움직임이 재연되고 있어 국제협조체제는 약화되는 느낌이다.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위기재발 방지를 위해 논의해온 방안들도 어느 하나 가시화, 구체화된 것이 없다. 전세계 결제통화를 미 달러화로 하자는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과 공동화폐 도입 논의, 차제에 아예 결제통화를 없애 버리자는 대안경제론, 변화된 환경에 맞춰 IMF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금융기구(WFA)를 창설하자는 방안들이 세계 각국의 경제주권 문제와 맞물리면서 이제는 거론조차 안되고 있는 실정이다.최근 들어 세계 투자자금이 고수익 고위험 자산에 몰리고 있어 성장잠재력 약화와 장기불황 우려를 낳고 있다.문제는 이렇게 국제금융시장이 악화됨에 따라 세계 각국들이 목을 메고 잇따라 인하하고 있는 금리정책이 정작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금리인하로 기대했던 증시와 경제안정에 미치는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게 우려되고 있어 앞으로 증시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일종의 딜레마 국면에 처할 가능성을 예고해 주고 있다.물론 통상적으로 금리가 경제에 미치는 시차가 3∼6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올 들어 각국이 단행한 금리인하 효과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직은 때이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상황을 놓고 볼 때 과거 금리인하 시기에 비해 증시와 경제안정에 미치는 효과는 의외로 적게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최근처럼 세계경기가 침체국면에 놓여 있을 때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금리인하에 따라 금융비용이 줄어들어도 경제주체들이 소비나 투자를 주저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다시 말해 금리와 총수요간의 관계가 ‘비탄력적’이기 때문이다.오히려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부작용이 더 우려되는 상태다. 무엇보다 올들어 계속된 금리인하로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계속 개입함에 따라 시장참여자들이 제 역할을 하기보다 증시와 경제가 침체될 때마다 금리인하와 같은 구제조치를 바라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특히 개도국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하다. 이에 따라 증시와 경제여건으로 봐서는 금리를 더 내려야 하는데 정작 금리를 내리다 보면 시장참여자들의 모럴해저드가 심해질 우려가 높기 때문에 중앙은행들이 궁지에 몰리면서 정책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되고 있다.요즘처럼 국제적으로 장단기 금리간의 차이가 없거나 단고장저(短高長低)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문제다. 저금리로 장기투자 수단이 매력을 잃음에 따라 시중자금이 단기화, 투기화되면서 머니 게임으로 치달을 경우 성장잠재력 약화와 장기불황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시중자금 단기화 투기화 ‘머니게임’ 우려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국제금융시장에서 중장기 투자수단으로 알려진 뮤추얼 펀드에서 헤지펀드나 머니마켓 펀드(MMF)와 같은 단기금융상품에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는 것도 이런 각도에서 이해되는 현상이다. 정도차는 있지만 국내금융시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이밖에 세계 각국의 경기는 침체속에서도 인플레 요인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인하를 위해 돈을 풀다보면 자칫 잘못하다간 경기침체아래 물가앙등이라는 스테그플레이션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결국 이런 상황에서 금리인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시장참여자들의 예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전격적이고 대폭적으로 이뤄져야 가능하다. 그만큼 금리인하에 따른 부담(정책비용)이 과거에 비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따라서 앞으로 중앙은행들은 금리인하에 따른 정책비용을 줄여나가는 차원에서 최근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미국에서는 정책의 주안점이 금리인하에서 세금감면책으로 옮겨지고 있다. 뉴욕 증시참여자들도 금리인하보다 인플레 안정여부와 세금감면책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이런 차원에서 보면 매 회계연도마다 2천억달러 내외의 재정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경제는 여전히 건전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재정면에서 여유가 없는 우리나라와 일본경제는 앞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그런데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여러 가지 위기재발 방안을 마련해 왔으나 9백60억달러가 조금 넘는 외환보유고만이 가시적이고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성과다. 이 때문에 현정부가 남은 집권 2년을 맞는 현시점에서 이뤄지고 있는 모든 평가에서 이 대목을 가장 첫 번째 치적으로 꼽고 있다.태생적으로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과제를 안고 출범했고 이 문제로 어느 경제주체보다 혜택을 많이 본 데다 스타가 된 정부이기도 하다. 출범 이후 3년 동안 여러 가지 실정이 있었으나 국민들로부터 양해가 됐던 것도 이런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문제는 최근 들어 다시 국제금융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남은 집권 2년 동안 외환위기가 재발될 경우 국민의 정부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는 자명하다. 현시점에서 굳이 출범 초기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어느 경제주체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