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금융인으로 한 길만 걸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현업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보니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패로 얼룩진 우리나라 금융사에 대해 누군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금융은 신음한다 designtimesp=21203>의 저자 유경찬씨(54)는 이렇게 해서 정리작업에 돌입했다. 지난해 6월 한불종금에서 퇴직하자마자 시작한 이 일은 끝내는 데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재직 중 목격했던 사건들과 거기서 느끼고 생각한 바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우리나라 금융 산업이 실패로 점철됐다면 저도 책임을 나눠져야 할 사람 중 하나겠죠. 하지만 오늘날 금융 산업이 부실 덩어리가 돼 가장 경쟁력 없는 업종으로 전락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 이제는 부실의 해결사로 둔갑해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꼭 지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는 77년 한불종금에 입사했고 지난해 국제투자본부장으로 일하다 퇴직했다. 한때 종합금융회사나 리스회사는 명문대 출신들이 선호하던 최고의 직장이었다. 땅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영업을 하던 이 회사들은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고 임금 수준도 타 금융권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하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돼 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고 나서는 현재 산업 전체가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업 중이던 26개의 종합금융사와 리스회사 20개사가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이것이 “예고된 재앙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종금사는 은행 증권 투신사 등 보험을 제외한 금융권의 거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시장 전체의 사정에 밝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쓴 <금융은 신음한다 designtimesp=21210>는 우리나라 금융사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70년대는 끝없는 자금 수요에 맞추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금융기관 설립 붐이 일었다. 외형 성장에 골몰해 몰락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80년대, 외환위기 이후 살벌한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완전 무장해제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기술하고 경쟁력있는 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상황이 혼란스러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이해하기 위함이라 한다.금융자료·기록 부실 … 집필에 애로책을 쓰면서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거나 공개돼 있지 않아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상공회의소와 한국은행 자료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자료를 모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역대 재경부 장·차관, 청와대 경제수석, 금감원장 등의 명단을 연표로 정리하는 데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야만 했다.“글쎄 청와대에 인사 기록이 없다는 거에요.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겨우 빼냈어요.” 과거의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거나 공개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투명하지 않고 토대가 부실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그는 “중복 과당 투자가 사회적 부채로 남을 것이라는 경고와 오늘의 상황이 과거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이를 확실히 정리하지 않고 넘어가면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며 “똑똑한 젊은 금융인들이 이 책을 읽고 오늘날 우리나라 금융의 왜곡된 근원을 이해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