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김용태 편집부장 ytkim@kbizweek.com사진·황선민 기자 hsm8844@kbizweek.com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낸 회사를 떠나게 돼 심정이 착잡하실 것으로 생각되는데요.이상하게도 후회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처음 한국전기초자의 경영을 맡으면서 지금까지 줄곧 직원들에게 해오던 말이 있습니다. “난 이 회사에 가장 늦게 입사해서 가장 빨리 떠날 사람”이란 얘기였습니다. 위기에 처한 회사를 맡은 경영자는 무엇보다 회사를 하루빨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 생각합니다.한국전기초자는 현재 위기에서 어느정도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마다 세웠던 목표를 매번 그 이상으로 달성했으니 후회스러울 건 없습니다. 다만 처음 세웠던 ‘혁신1기’의 목표가 마무리되고 LCD 등 새로운 부문에 대한 의욕이 샘솟고 있는 과정에서 도중하차 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사임한 뒤 기업들로부터 사장으로 와달라는 제의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계획인가요.그동안 기업들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사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더군요. 아직은 서두칠이가 쓸만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습니다. 올 연말까지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습니다. 그동안 회사 업무와 아사히측과의 긴 줄다리기를 핑계로 미뤄왔던 강연을 ‘마음 놓고’ 다닐 생각입니다.지금은 대기업이건 중소벤처기업이건 CEO가 기업의 주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 간의 경험들을 살려 기업들에 미약하나마 힘이 됐으면 합니다. 이름을밝힐 순 없지만 몇몇 업체로부터 전문경영인으로 와달라는 제의도 있긴 있었습니다. 오해를 받기 싫어 모두 거절했습니다. 책을 내고 강연도 다닌 탓에 주위에선 ‘구조조정 전도사’란 쑥스러운 별명도 붙여 줬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빠른 시일내 경영일선에 복귀해야지요. 그러나 연말까진 강연과 공부에 몰두하면서 한국식 경영혁신모델을 만들고 전파할 생각입니다.사임 후 회사의 주가가 30%나 떨어지는 등 ‘충격파’가 만만찮습니다. 앞으로 한국전기초자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십니까.올 상반기엔 지난해 상반기보다 1백억원 정도 늘어난 7백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흑자로 돌아선 이후 보유하고 있는 현금만도 1천3백억원에 달합니다. 이 정도 재무구조라면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연말까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사히측은 당초 계획대로 생산라인을 줄이고 느슨하게 라인을 운용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머지않아 생산라인이 준 만큼 상대적으로 고정비용이 올라가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조의 동요를 무마하기 위해 마지 못해 공약한 고용보장도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또 전기초자엔 차세대 부문인 LCD모니터를 개발하기 위한 테스트라인 도입 프로젝트도 현재 중단된 상태입니다.3년7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단 한명의 직원도 내보내지 않고도 구조조정에 성공했습니다.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CEO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기업의 자산엔 물적자산과 지적자산, 그리고 (고객 노사)관계자산이 있습니다. 이 중 관계자산이 가장 중요하며 그 중에서도 노사관계는 핵심입니다. 노사문제의 1차적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습니다. 열린경영이란 기업의 재무제표를 공개하는 것 이상입니다. 직원들에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현재의 문제는 무엇인지 낱낱이 알려줄 의무가 경영자에게 있습니다. 이를 통해 직원들이 스스로 ‘일하는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이 단순히 생계를 꾸려가는 재미없는 수단이어선 안 됩니다. ‘일=삶’이란 생각이 있을 때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다름아닌 최고경영자가 불어 넣어줘야 합니다. 또 경영자라면 직원들에게 미래와 비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전’이란 캄캄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에게 이정표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이정표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식 경영’의 경영자 모델이 될 것입니다.일본 아사히측과 경영전략상 갈등으로 사임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려주시지요.지난해 11월부터입니다. 그 때부터 전기초자와 아사히는 경영전략에서 마찰이 생겼습니다. TFT-LCD 시장이 모니터 유리 시장을 잠식해오는 상황에서 하반기로 접어들며 이전까지 모니터 유리의 5배 정도였던 LCD 모니터 값이 2배까지 떨어졌습니다. 전기초자와 마찬가지로 모니터 유리에 주력해온 아사히측에선 가격을 맞추기 위해 감산 정책을 전기초자에 강요해 왔습니다. 성공적 구조조정으로 위축된 시장에서도 전혀 생산량을 줄일 이유가 없는 전기초자로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일본과 부산에서 두 차례나 아사히측 대표단과 협상을 했지만 모두 결렬됐습니다. 2차 협상 때 아사히측으로부터 영업을 전담할 부서를 파견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영업권을 장악하겠다는 건 결국 가격결정권과 가격에 맞춰 생산량까지 조절하겠다는 의도로 밖엔 달리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전기초자의 경영자는 한낱 아사히 한국 현지 생산기지의 공장장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영업권 없이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경영자로 남아 있을 순 없다고 판단해 사임을 결정했습니다.아사히측의 영업전략과 글로벌 정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잘되는 회사(전기초자)를 안 되는 회사에 맞춰 하향조정해 다 지키겠다는 것은 결국 ‘다 망하자’는 얘기입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3개 회사 정도는 과감하게 정리하고 나머지 경쟁력 있는 쪽을 더 잘 되도록 키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돈을 댈 테니 중국에 공장을 짓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했습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유리분야가 사양산업이란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사양 산업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양 기업’이 있을 뿐입니다. 계속 줄어들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세계 모니터 유리의 수요량은 연간 2억8천만개에 육박합니다. 이중 전기초자의 시장점유율은 9%도 안됩니다. 지금처럼 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계속 만든다면 재고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기업의 경영전략이란 ‘고객의 선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IMF 경제위기 이후 도입된 외국 대자본의 횡포도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는데요.이번 일로 새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더 배웠습니다. 바로 ‘외자에도 품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대주주라고 해도 경영자에게 회사를 맡겼으면 그 실적을 놓고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지 성장하고 있는 회사의 발목을 잡는 경영권 침해를 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외자를 평가할 때 이런 투자마인드가 없는 기업이 주는 돈이라면 아무리 아쉬워도 받으면 안될 것입니다. 고유한 경영권마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Profile in Mirror서 전 사장은 재직 시절 거래은행이나 호텔 등을 방문할 때마다 접수를 받는 여직원을 나무랄 때가 많았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면서도 정작 손님하고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객의 선택을 얻기 위해선 고객과 하나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고객감동’이란 예절교육을 하거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캠페인을 벌인다고 얻어낼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진심으로 고객의 입장에 서서 내가 파는 물건을 구입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전기초자를 구조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감산이나 인원감축을 택하지 않고 직원 편에서, 또 고객 편에서 모두 감동할 수 있는 1백% 자산활용으로 원가 품질 가격 경쟁력을 이끌어냈다. 지난 3월엔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designtimesp=21343>라는 책도 펴냈다. 퇴출 1호 기업이 3년만에 세계 최고 기업으로 탈바꿈한 과정을 생생하게 담은 이 책은 경제서로는 드물게 6만부가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