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우량고객 한정, 일반 고객엔 추가금리 요구 … 무분별한 대출로 가계부실 위험 수위
한빛은행 대출창구전례없는 초저금리는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새로운 전략을 강요하고 있다. 즉 종전의 예금유치경쟁 대신 대출전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한 시중은행 여신담당자는 “은행에 돈이 남아 돌고 있는 상황에서 은근슬쩍 고금리를 요구하는 기관들의 거액예금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돈을 받아봤자 마땅히 굴릴 데가 없어 예금유치가 오히려 금융기관의 수익성만 악화시키는 애물단지가 됐다는 것이다.그러나 대출을 통해 자금을 운용하는 전략도 만만치가 않다. 대출수요가 예전같지 않은 탓이다. 자금의 최대 수요처인 기업분야에서 경기전망의 불투명으로 인해 수요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고금리 빚을 갚겠다고 은행에 찾아오는 기업만 줄지어 서 있다. 그렇다고 위험성이 높은 기업에 대한 대출은 여신건전성을 까먹으니 대출을 해주기도 어렵다. 은행이 올들어 가계대출 증대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기업대출 비해 안전, 가계대출 주력가계대출은 일단 기업대출에 비해 안전성이 높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상반기 중 은행권의 기업대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 증가한 데 그친 반면 가계대출은 무려 37%나 늘어났다. 6월말 현재 은행권의 가계대출 총잔액은 1백23조5천7백19억원을 기록했다. 가계대출 가운데 주택자금은 대출은 26조1천5백94억원으로 15% 증가에 그쳤으나 일반가계대출은 97조4천1백25억원으로 44%나 늘어 가계대출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은행이 자금운용처를 ‘가계대출’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한 시중은행 임원은 “주택을 담보로 한 가계대출이 기업대출에 비해 떼일 가능성이 적고 수익성 측면에서도 뒤질 게 없다”면서 “지금처럼 경기전망이 불투명할 때는 주택담보대출을 주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일각에선 급증하고 있는 가계대출의 후유증을 우려하고 있다. 최근 가계대출이 대부분 주택을 담보로 한 담보대출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부동산 거품 붕괴’ 이후 일본의 시중은행들이 겪었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수신금리는 급속도로 떨어지는 반면 여전히 대출금리는 천천히 인하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행이 지난 7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콜금리를 인하한 뒤 시장금리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지난 7월초 연 6% 대를 웃돌았던 3년만기 국고채 유통수익률은 최근 들어 연 5%대 밑으로 하락하기도 했다.시장금리가 이처럼 하락세를 지속하자 은행 종금 등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여·수신 금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은행권의 예금금리인하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불과 한두달 전만 하더라도 연 6%대를 넘었던 정기예금 금리(고시금리 기준)는 연 5% 밑으로 떨어졌다. 국민 주택등 대부분의 은행은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를 2~3차례에 걸쳐 0.3~0.6%포인트 인하했다. 합병을 앞둔 국민·주택은행의 경우 지난 7월초 1년제 정기예금 금리(전결금리 기준)가 연 6.0%였으나 두차례의 금리인하로 8월초부터 연 5.6%로 낮아졌다.신한 하나 한미은행은 현재 연 5.4%를 적용하고 있다. 물론 조만간 추가인하 가능성도 있다. 반면 대출금리는 크게 내리지 않았다.양도성예금증서(CD)연동형 대출과 같이 시장금리 변동에 따라 대출금리가 결정되는 상품은 시장금리와 함께 자동적으로 대출금리가 내려갔다.그러나 문제는 시장금리 연동 대출의 비중이 전체 은행권 대출의 30~40%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나머지 60~70%의 대출은 프라임레이트(우대금리) 연동형 대출이다. 이는 은행이 제시한 기준금리(프라임레이트)에 가산금리(스프레드)를 붙여서 결정되는 대출금리이다. 은행이 프라임레이트를 조정하지 않는 한 대출금리가 내려갈 수 없는 구조다.현재 은행의 프라임레이트는 평균 9.75%로 2년전과 변함없다. 지난 2년간 수신금리의 인하폭과 비교하면 납득하기 힘든 이율이다.금융회사들이 저금리로 대출세일에 나서고 있다지만 이 역시 알고 보면 겉다르고 속다른 경우가 태반이다. 은행 보험 캐피털 등은 초우량고객에게만 한정적으로 적용하는 ‘최저금리’를 앞세워 고객들을 유인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점포에 들러보면 ‘추가금리’를 요구하는 바람에 발길을 돌리는 고객이 한 둘이 아니다.가령 삼성생명이 자동차 할부금융상품인 ‘오토론’을 판매하면서 내세우는 대출금리는 연 8.9~9.3% 선. 하지만 고객이 부담해야하는 보증보험료 0.96%를 포함하면 오토론의 실제 대출금리는 9.86~10.26%로 뛰어 오른다. 여기에 자동차 근저당 설정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대출금의 0.6%)까지 포함하면 실제 부담해야 하는 금리는 10.86%까지 치솟는다.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역시 마찬가지다. 평화은행 씨티은행 등 일부은행에서 연 6%대로 금리를 제시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 우량고객에만 적용된다. 사상초유의 초저금리로 금융회사간 대출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대출소비자들에겐 크게 실속이 없는 셈이다.가구당 빚 2천만원 … 신용대란 가능성도금융회사의 무분별한 가계대출로 가계부실이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은행대출이나 카드 사용대금을 제때 갚지 못해 금융거래에 제약을 받는 신용불량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 빚과 신용불량자가 느는 원인은 물론 1차적으로 개인이나 가정의 재무 관리가 부실한 데 있다. 그러나 보다 큰 원인은 은행들이 개인 고객만 확보하려는데 있다.신용불량자수는 올들어 정부가 적극적인 신용사면 정책에도 불구하고 증가추세다. 지난 6월말 현재 2백75만명으로 지난해 3월말(2백32만명)에 비해 무려 18.5% 늘어났다. 이는 경제활동인구(약 2천2백만명) 1백명당 12명이 신용불량자라는 얘기다.신용불량자수가 급증하는 주된 원인은 물론 국내 경기위축에 따른 가계의 소득감소다. 그러나 민간 경제전문가들은 “작년말부터 가계대출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데다 미국 등 선진국 경제도 악화되는 등 대내외 여건을 감안할 때 신용대란의 가능성도 완전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계대출과 부채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데 반해 소득 증가폭은 이를 따라가지 못해 신용불량 상태에 빠지고 있다는 분석이다.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말 현재 가계대출잔액(카드론·현금서비스 포함)은 총 2백60조원으로 지난해말보다 21% 증가했다. 가구당 은행 대출잔액이 2천만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가계실질소득은 지난해보다 5.3% 증가하는 데 머물렀다. 올 상반기 중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이용액이 지난해보다 2배 가량 증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금리가 높을 때는 이자상환 부담이 높아져 대출보다는 부채상환에 돈을 쓰게 되지만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으면 저축의욕은 떨어지고 소비성향이 강해져 신용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가계부채가 이처럼 크게 늘어나면 가계 스스로 쉽게 빌린 돈을 감당치 못하고 빚더미에 눌리는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 수도 있는 것이다.장진모·한국경제 금융부 기자Jang@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